덴마크 인들은 한국인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곳에서는 요즘 북한을 탈출한 한 남자의 이야기가 화제다. 워싱턴포스트 기자인 블레인 하든이 쓴
‘캠프 14로부터의 탈출’의 주인공 신동혁이 그 사람이다.
신씨는 북한의 강제 수용소에 태어나 그곳을 탈출, 자신의 삶을 기록으로 남긴 유일한 인물이다. 신씨는 같이 탈출하려던 동료가 전기 철조망에 걸려 감전사한 시신을 밟고 극적으로 빠져나온 후 중국을 전전하다 한국에 왔다. 그는 북한의 실상을 알리기 위해 회고록을 썼지만 한국에서 그가 받은 것은 무관심과 냉대뿐이었다. 이 책이 하든 기자의 눈에 띄어 그가 다시 쓴 영문판이 나왔고 그것이 세계적인 주목을 받은 것이다. 이 책은 지금 덴마크에서 베스트셀러 1위고 유럽의 거의 모든 나라 언론이 신동혁 스토리를 1면 주요 기사로 다뤘다.
그가 지난 12일 LA에 왔다. 그러나 그를 초청한 것은 LA 한인 커뮤니티가 아니라 유대인들이었다. 행사가 열린 장소도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잊지 않기 위해 세워진 ‘관용 박물관’(Museum of Tolerance)이었다. 신연성 총영사 등이 연사로 나오기는 했으나 한인들의 참여는 미미했다.
북한에는 요덕과 개천 등 평안도와 함경도 오지에 최소 6개의 강제 수용소가 운영되고 있다. 이 수용소에는 각각 최대 5만에서 수천 명, 총 20만 명의 죄수들이 수감돼 있다. 북한 당국은 존재 자체를 부정하고 있지만 그 모습은 인공위성 사진으로 뚜렷이 보이며 탈출자들의 증언으로 수용소의 실상도 자세히 알려져 있다.
이 수용소에 갇혀 있는 것은 정치범만이 아니다. 어쩌다 북한 당국이나 김일성 일가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았다 누가 밀고라도 하면 온 가족이 끌려올 수 있다. 먹을 것이 없어 중국 국경을 넘었다 송환당한 사람도 숱하게 있다. 일단 이곳에 갇히면 인간으로서의 지위는 박탈된다. 간수는 신이고 죄수는 벌레다. 간수의 명령에는 무조건 복종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다. 사소한 복종 거부에도 무자비한 고문이 가해진다.
죄수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 중 하나는 ‘비둘기 고문’이다. 손을 뒤로 묶어 땅에서 60센티미터쯤 되는 곳에서 설치한 고리에 매달아 둔다. 서지도 앉지도 못하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당해 보지 않은 사람은 모르는 극심한 고통에 시달려야 한다. 좀 더 죄질이 나쁘다고 판단될 때는 ‘통닭구이’를 실시한다. 손발을 묶어 막대기에 걸어놓고 불 위에서 통닭처럼 굽는 것이다.
새벽부터 밤까지 계속되는 강제 노동과 배고픔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방법은 동료 죄수에 대한 밀고다. 밀고 실적이 매우 높은 남녀에게는 부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특권이 부여된다. 신동혁 본인도 이렇게 맺어진 남녀 사이에서 태어났다. 이곳에서 태어난 아이들은 가축 같이 사육되며 강제노동과 함께 밀고의 책무가 주어진다. 배고픔에 시달리던 신동혁은 어느 날 생모와 친형이 탈출을 모의하는 것을 듣고 일러바쳤다. 형과 엄마가 즉결 처형됐지만 자신은 아무런 죄책감도 없었다 한다. 그날그날 먹고사는 것이 급선무였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에게만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강제수용소에 수감돼 있는 20만 죄수들이 나날이 겪는 일이다. 악명 높은 아우슈비츠는 3년간 지속됐지만 북한의 강제수용소는 50년째 계속되고 있다. 이들 수용소의 실상이 점차 알려지고 있음에도 한국민의 태도는 너무도 무덤덤하다. 대선 캠페인이 한창인 지금 대선주자 누구도 이 문제를 거론조차 하지 않는다.
한국에서는 지금 박정희 시절 극심한 고문을 당한 김근태 기념관을 남영동 대공 분실에 설치하자는 움직임이 일고 있다 한다. 한국민은 30여년전 저질러진 고문은 규탄할 줄 알면서 지금 우리 눈앞에 벌어지고 있는 북한의 살인적인 야만 행위에 대해선 침묵한다. 교통사고로 죽은 효순 미선 양을 위한 추도 시위나, 한 명의 한국인도 죽이지 않은 광우병 항의 집회에는 수 만 명이 촛불을 들면서 북한 인권에는 철저히 무관심하다. 영원할 것 같던 나치와 스탈린의 강제수용소는 이제 역사의 쓰레기통으로 사라졌다. 북한도 언젠가는 같은 운명을 맞게 될 것이다. 후세의 사가들이 이 시대를 산 한국민을 어떻게 평가할지 궁금하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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