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욱 객원논설위원
“낙엽이 우수수 떨어질 때/ 겨울의 기나긴 밤 어머님하고/ 둘~이 앉~아/ 옛이야기 들어라/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옛 이~야기 듣는가/ 묻지도 말아라 내일 날의/ 내가 부모 되어서 알아보리라” 김소월의 시 ‘부모’다. 낙엽·옛이야기·태어남·내일·어머니를 그리는 마음 등을 담고 있다. 낙엽이 떨어져 쌓인다. 인생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가을의 향기가 물씬 풍긴다. 이제 곧 차가운 겨울이 되겠지. 누가 명령을 내리는 것도 아닌데 자연의 순환법칙은 한 치의 틀림도 없이 지켜진다. 떨어지는 낙엽들을 보며 자신의 태어남과 삶, 죽음 등등을 자연과 더불어 생각해 보는 절기다. 또 책을 머리맡에 놓고 책속에 담긴 저자들의 생각과 마음을 알아보는 때인 사색의 계절이다.
<남자의 물건>이란 책을 보았다. ‘김정운이 제안하는 존재확인의 문화심리학’이란 부제가 달려 있다. 처음엔 남자의 물건이라 하여 별 이상한 제목도 있구나했는데 그게 아니다. 한국에서 잘 나가는 열 명의 남자가 아끼는 물건들을 소개한 내용이다. 책상, 벼루, 계란 받침대, 바둑판, 스케치북, 안경, 수첩, 지도, 면도기, 목각수납통 등이다.
책상을 물건으로 둔 이어령. 책상이 3미터가 넘는다. 김정운은 말한다. “오늘도 장군 이어령은 잘 나오지도 않는 볼펜, 잉크가 말라버린 만년필, 심이 부러진 연필을 들고 3미터 책상 위에서 그의 부하들에게 호령을 한다. 그의 언어들은 잘 훈련된 군사다.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고 진군한다. 그래서 그는 책상 앞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다”고.
누구에게나 있는 자신만의 보물처럼 아끼는 물건들. 이민생활 30여년 만에 무슨 아끼는 물건이 있겠는가만 그래도 보물처럼 아끼는 것들은 책과 노트인 것 같다. 얼마 전 아파트 페인트칠을 한 까닭에 책을 창고에 보관해야만 했다. 책이 없는 방에 덜렁 누워 있는 자신의 모습은 영혼이 달아난 어느 목각 인형이 누워있는 듯 했다.
김정운은 <~물건>에서 그리움에 대해 말한다. 독일인들은 가장 아름다운 단어로 ‘그리움(Sehnsucht)’을 꼽는단다. 한국말 그리움은 ‘글’ ‘그림’과 어원이 같다. 종이에 그리면 그림이나 글이요 마음에 그리면 그리움이다. 그는 가슴 저린 그리움이 있어야 살아온 삶에 대한 기쁨, 사랑, 소유한 모든 것들에 대한 감사가 생긴다한다.
김소월이 어머니를 그리워했듯 우리 모두에겐 그리움이 있다. 그리움을 간직한 채 사는 사람이야말로 진정 자신의 생명을 확인하며 살아가는 존재일는지도 모른다. 낙엽 밟혀지는 가을. 가을은 그리움의 계절이다. 이미 떠난 사람에 대한 그리움. 아직 만나지 못한 사람에 대한 그리움을 그려보자. 그림과 글로, 혹은 마음에 그려보는 거다.
영국의 종교철학자 화이트헤드는 “존재하는 것(being)은 형성(becoming)되는 과정”으로 본다. 즉 “흐름을 중심으로 보면 과정이 되고, 관계를 중심으로 보면 유기체가 된다”는 ‘실재=과정’인 유기체적세계관을 말한다. 생(生)도 결과 아닌 과정이 된다. 동양철학과 일맥을 같이하는 화이트헤드의 과정철학은 뉴턴의 결정론적 사고방식을 거부한다.
모든 게 다 과정임은 우주의 팽창에서도 검증된다. 장주는 <장자>‘지락(至樂)’편에서 “생사의 애락(哀樂)을 초월하고 일체의 기성관념을 넘어 생사를 하나로 알고 자연에 순응하여 무위(無爲)의 경지에서 유유히 노니는” 삶을 논한다. 그는 아내가 죽었을 때 질그릇을 치며 노래를 부른다. 아내의 죽음을 춘하추동의 되풀이됨에 비유한다.
인간도 자연의 일부임을 동양철학에선 말한다. 인간의 태어남과 죽음을 자연의 태어남과 사라짐에 비유한다. 봄이 가면 여름이, 여름이 가면 가을이,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오듯이. 자연의 순환법칙은 순리다. 태어나며 죽고, 죽으며 태어나고. 떨어져 밟히어 흩어지는 낙엽을 바라보며 자연 속 흐름의 유상함과 무상함을 같이 보게 된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산 속 낙엽은 떨어져서 썩는다. 그리곤 추운 겨울을 지나 봄을 맞아 새롭게 자라는 나무와 새싹들의 밑거름이 된다. 새 생명의 탄생에 거름이 되어 함께 아지랑이처럼 다시 피어난다. 가을의 향기가 볼을 타고 감미롭게 스친다. “나는 어쩌면 생겨나와 옛 이야기 듣는가” 낙엽이 우수수 떨어진다. 5색 단풍이 가을 하늘을 아름답게 수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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