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 달의 긴 여름방학을 끝낸 연방대법원의 새 회기가 이번 주부터 시작되었다. 지난 6월말 정계와 법조계의 예상을 뒤엎고 존 로버츠 연방대법원장이 오바마의 헬스케어개혁법을 합헌으로 살려내고 폐정한 후 세계 곳곳으로 휴가를 떠났던 9명의 대법관들이 대선 캠페인으로 뜨겁게 달아오른 워싱턴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그때 ‘확실한 보수’ 로버츠가 ‘배신자’라는 보수진영의 공격을 감수하면서까지 진보와 손잡은 이유에 대해 분분했던 추측 중 우세한 것은 정치 양극화 싸움판에서 대법원의 명성을 지켜내기 위한 전략이라는 분석이었다. 본인이 입을 다물었으니 확인할 수는 없지만 그게 맞는다면 로버츠의 전략을 성공한 셈이다. 네거티브 공세가 난무하는 이번 선거전에서 ‘연방대법원’은 거의 실종 상태, 유세지에서도 토론장에서도 거론되지 않고 있으니까.
하긴 연방대법원이 투표에 회부된 것은 아니다. 그러나 표현의 자유에서 인종 및 성 차별·낙태·결혼과 투표·취업과 종교·건강과 세금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기본권이 관련된 모든 이슈의 합헌성 여부가 대법원에 의해 최종 결정된다. 그리고 현 대법원의 앞날은 바로 이번 선거결과에 의해 좌우될 것이다.
어느 대통령이 언제 새 대법관을 지명할 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래도 2016년까지 차기 대통령에게 1~3번의 기회가 올 것으로 관계자들은 예상한다. 현 대법원이 뉴딜시대 이후 최고령이기 때문이다. 진보파의 중심인 70세 루스 긴스버그, 76세 동갑인 강경보수 앤토닌 스칼리아와 중도보수 앤소니 케네디, 진보파 74세 스티븐 브레이어까지 70대가 4명이나 된다.
오바마가 재선된다면 긴스버그와 브레이어에게는 진보진영으로부터 은퇴압력이 가해질 것이다. 젊은 진보를 입성시키기 위해서다. 롬니가 당선된다면 두 번이나 암 투병을 한 긴스버그도 민주당 대통령이 다시 취임할 때가지 버텨야 한다. 물론 뜻대로 되는 건 아니다. 1950년대 대법관 로버트 잭슨은 심장마비로 62세에 숨졌고 민권법의 우상인 덕우드 마셜은 레이건과 아버지 부시, 두 공화대통령 시절이 지날 때까지 버티려 했으나 1991년 82세 때 건강악화로 은퇴를 발표했다. 후임이 마셜과는 정반대인 초강경보수 클레어런스 토머스 대법관이다.
이미 세간에는 양 후보 당선시 누가 새 대법관이 될지 후보명단까지 구체적으로 나돌고 있다. 정작 오바마나, 롬니는 언급조차 하지 않지만. 4년 전 대법관의 인선 기준을 “보통사람과의 공감 능력”으로 밝혔다가 운동권 대법원을 만들려하느냐는 비판에 직면했던 오바마는 금년엔 한마디도 하지 않았고, 로버츠 대법원장을 대법관의 롤모델로 공언했던 롬니 역시 로버츠의 오바마케어 합헌 판결이후 입을 다물고 있다.
헬스케어개혁법과 애리조나 반이민법안 판결로 전국을 용광로처럼 들끓게 했던 지난 회기 못지않게 1일 개정한 대법원의 2012-2013년 회기도 강한 조명을 받게 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번 주요판결들이 주제가 연방정부 권한이었다면 새 회기의 중심테마는 ‘평등(equality)’이다.
대학에 가고, 결혼하고, 투표하는 사람들의 평등한 기본권을 헌법이 어디까지 보호하고 허용할 수 있는가를 제시해 줄 것이다. 대학 입학사정의 소수계 우대정책(Affirmative Action)과 동성결혼, 1965년 투표권법 관련 위헌소송들이 대법원에 올라와 있다.
아마도 이번 회기 중 가장 요란한 논쟁을 부를 사안은 동성결혼이 될 것이다. 11월경 심리여부가 확정되면 ‘역사적 판결’을 기대할만 하다. 올라온 케이스는 두 가지다. 하나는 이미 동성결혼이 허용된 주에서 결혼한 동성커플에 대해 연방정부 혜택을 금지하고 있는 결혼보호법(Defense of Marriage Act)에 대한 위헌소송이고 다른 하나는 캘리포니아의 동성결혼 금지 주민발의안 ‘프로포지션 8’의 위헌소송, 둘 다 항소법원에선 위헌판결을 받았다.
어떤 케이스를 택해 판결하든 대법원은 현대 미국사회를 양분시키고 있는 가장 뜨거운 문화전쟁의 한복판에 뛰어드는 셈인데 합헌판결이 나올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다음주 10일에 심리할 어퍼머티브 액션과 아직 심리일이 정해지지 않은 투표권법 케이스는 그 배경의 주장이 일맥상통한다. 텍사스법대 입학을 거부당한 백인여학생의 역차별 소송과 ‘인종차별 역사를 가진 주 및 지역정부들은 선거법 규정을 바꾸기 전 연방정부의 승인을 받아야한다’는 투표권법 제5조에 대한 위헌소송이다. 흑인대통령까지 배출할 만큼 시대가 달라졌는데 아직도 인종에 근거해 대학입학 특혜를 주고, 소수계 투표 시 발생할지 모를 불이익을 법으로 미리 보호할 필요가 있느냐는 지적이다.
민권운동가들은 소수계보호법의 폐지는 시기상조라고 우려하지만 현 보수성향 대법원에선 둘 다 위헌판결 소지가 다분하다고 상당수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2003년 미시간법대 소송에서 소수계 우대정책 합헌 판결을 내렸던 당시 대법원의 ‘스윙보터’ 샌드라 데이 오코너 대법관은 이 정책이 향후 25년간은 더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었다. 그러나 겨우 9년 만에 대법원은 칼을 빼들었다. 투표권 법 역시 2006년 연방의회가 심층연구를 거친 후 25년간의 연장을 결정한 사안이다.
어퍼머티브 액션이나 투표권법에 대한 찬반논쟁이 변해서가 아니라고 LA타임스는 지적한다. 변한 것은 중도파가 은퇴하고 보수파가 입성한 대법원의 이념 지형이다. 여기에 긴스버그 대법관이 은퇴한 후 보수파 대법관이 더 늘어난다면?
11월 우리의 한표 행사에 대법원의 앞날과 소수민의 평등권 보장도 달려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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