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 행정부가 이룩한 큰 업적 중 하나는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의 비준이다. 아버지 부시 행정부 때 체결되기는 했으나 의회 다수당인 민주당이 반대하는 바람에 비준은 어려운 처지였다. 전통적인 리버럴과는 달리 온건 노선의 ‘신민주당원’(New Democrat)을 자처했던 클린턴은 당선되자 이 협정의 비준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그 총대를 멘 사람이 부통령이었던 앨 고어였다.
고어는 토론의 강자로 이름나 있었다. 하버드에 들어가자마자 학생회장에 출마해 당선되는 데도 토론 실력이 한몫을 했다. 그 때부터 갈고 닦은 토론 실력은 93년 로스 페로와 벌인 NAFTA 찬반 토론에서 유감없이 발휘됐다. “NAFTA가 시행되면 미국의 일자리는 모두 멕시코로 빨려 갈 것”(the giant sucking sound)을 외치는 페로 앞에서 고어는 탄탄한 자료를 토대로 어째서 이 협정이 미국에 도움이 되며 이에 관한 우려가 근거 없는 것인지 차근차근 설명해 갔다.
그리고 대공황 때 모호 무역주의를 내걸고 ‘스무트 홀리 법안’을 통과시킨 스무트와 홀리 연방 상하원의원 사진을 들고 나와 “이들도 한 때는 그럴 듯 해 보였지만 지금은 대공황의 주범으로 지탄받고 있다”고 질타, 페로를 꼼짝 못하게 만들었다. 토론은 고어의 압승으로 끝났으며 여론의 흐름을 바꾸고 흔들리던 민주당 의원들의 마음을 돌려놨다. 토론 후 1주일 만에 NAFTA는 여유 있게 연방 의회를 통과했고 페로의 정치 생명도 끝났다.
그러나 이 때 거둔 승리가 고어의 백악관 입성을 막았다. 2000년 가을까지 고어는 여론 조사에서 공화당 대통령 후보인 아들 부시를 앞서고 있었다. 3번의 토론을 앞두고 있었지만 토론 능력에서는 학교 다닐 때 공부도 별로 잘 못하고 ‘텍사스 촌놈’으로 치부되던 부시보다 고어가 월등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어 문제가 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됐다.
그러나 첫 번째 토론에서 고어는 시종일관 부시를 무시하는 태도를 취해 시청자들의 반감을 샀다. 부시가 얘기하는데 싱글싱글 비웃으며 고개를 열심히 젓는 모습은 압권이었다. 그의 태도는 모든 TV 코미디 프로에서 조롱거리로 떠올랐고 이를 본 고어는 큰 충격을 받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 다음에 열린 2차 토론에서 고어는 1차 때와는 정반대로 부시에게 굽신거린다는 인상을 줄 정도로 완전히 변신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 어느 것이 진짜 고어 모습인지 유권자들을 어리둥절하게만 든 것이다. 두 번에 걸친 토론은 고어의 진정성을 의심받게 만드는 결과를 초래, 그의 표를 깎아 먹었다.
전문가들은 1960년 대통령 후보 토론이 TV로 중계되기 시작한 이래 대선 결과를 바꾼 것은 1960년 케네디-닉슨과 2000년 부시-고어 단 두 번뿐인 것으로 보고 있다. 두 번 다 토론 내용이 아니라 이미지가 결정적이었다. 60년에는 케네디의 쿨한 모습과 땀을 뻘뻘 흘리는 닉슨의 대조가, 2000년에는 건방지고 변신을 거듭하는 고어와 소박하면서도 겸손한 부시의 이미지가 승패를 가른 것이다.
승패에는 영향이 없었지만 유권자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긴 토론으로는 1980년과 1984년 선거가 꼽힌다. 1980년 레이건은 카터의 강공을 “또 그러시네(There, you go again)”라며 가볍게 받아 넘긴 후 ”4년 전보다 살기 좋아졌습니까“라는 한 마디로 받아쳤다. 1984년에는 레이건의 고령에 관한 먼데일의 우려를 ”나는 상대방의 무경험과 미숙함을 문제 삼지 않겠다“며 유머 있게 받아넘겼다. 이 말을 듣는 순간 청중들과 함께 웃으며 먼데일은 ”모든 게 끝났다“고 생각했다고 털어놓은 적이 있다.
올해 대선 토론회가 하루 앞으로 다가왔다. 대통령 후보간 토론은 3일 덴버를 시작으로 이 달 말까지 세 번 열린다. 각종 여론 조사에서 뒤지고 있는 롬니로서는 전세를 역전시킬 마지막 기회인 셈이지만 토론에서 결정적인 펀치를 날린다는 것은 몹시 힘들다는 것을 대통령 후보 토론의 역사는 보여준다. 올 대선 결과는 거의 결정된 것 같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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