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병렬 (교육가)
벌떡 일어나서 손뼉을 쳤다. 영화계의 비주류 김기덕 감독이 세계 3대 영화제인 베니스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한 뉴스를 듣는 순간이었다. 드디어 그의 한국영화는 세계적으로 인정을 받은 것이다. 그는 그동안 자신의 길을 뚜벅뚜벅 꾸준히 걸어왔다. 오락영화보다 예술영화를 택했고, 흥행실적보다는 자신의 메시지를 관객에게 전하고자 했다. 가족이나 사회의 뒷받침이 별로 없이 자신이 원하는 길을 찾아 헤매다가 기어이 첫 단계의 뜻을 이뤘다. 필자가 그에게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2003년 제작 ‘봄.여름.가을.겨울 그리고 봄’이 뉴욕에서 상영된 것을 관람한 후의 일이다. 오래전의 줄거리는 분명치 않으나 어떤 색다른 아름다운 세계를 본 느낌을 받았다. 호수 한가운데 절이 있다는 설정부터.
그런데 교실 안에도 뚜렷한 ‘나’의 존재를 알리는 어린이들이 있다. “마음대로 색종이를 고르세요” 수많은 색깔의 색종이 앞에 선 어린이들의 모습을 본다. 첫 번 손 댄 것을 집는다, 비교하다가 집는다, 집었던 것을 내려놓고 다른 것을 집는다, 제자리에 갔다가 다시 와서 바꿔 집는다, 끝까지 한 자리를 지키며 색종이의 색깔들 위로 눈이 움직이지만 그중에서 한 장을 선택하지 못하고 그대로 서있다. “이것은 어때? 저것은 어때?”하면서 친구들이 도와준다. “내 맘대로 할 거야, I like to be myself!” 그는 끝내 색종이 한 장을 집어 들고 제자리로 간다. 작은 그의 모습이 그렇게 당당할 수 없다.
세상에 까만 사과가 있을까. 분명히 있다고 한 어린이가 말한다. “사과의 색깔은 무엇이에요?” 어린이들이 대답한다. “빨간색”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야, 노란색” 몇 어린이가 눈을 크게 뜬다. “초록색 사과도 있어” 이번에는 더 많은 어린이가 수군거린다. “어디 그런 사과가 있어? 아마 덜 익었나 봐” “아니야, 그런 종류도 있어. 내가 먹어 봤거든” 이번에는 큰 소리가 났다. “까만 사과도 있어.” 교실 안의 어린이 모두 일어선다. “아무리?” 그 어린이가 말한다. “방안의 전등을 꺼봐. 모두 까맣지. 거기 있던 사과도 까만색이 되거든” 모두 한바탕 웃는다. 이런 과정을 지나면서 어린이들의 생각 영역이 넓어진다. 그들의 상상력이 날개를 편다. 어찌 ‘사과는 빨갛다’ 한 마디로 고정시킬 필요가 있겠는가. 상상의 문을 ‘쾅’하고 닫아버린다면 아깝다. 그 안에서 재미있는 생각들이 쪼그라들다가 말라버리지 않겠나.
김기덕 작품 영화에 왜 대중들이 열광하지 않는가. 베니스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탈만큼 예술성이 있다는 인정을 받았는데도 불구하고 “그래서 가봤더니...”라는 솔직한 감상이 나오는가. 끝까지 영화를 감상하면 용서와 구원이 사람들 마음을 움직이겠지만, 그 과정이 사회 밑바닥에서 오가는 물리적 폭력이나 극단적인 야성이 드러날 때 많은 사람들이 눈을 돌리게 된다. 그가 그 야성을 잘 정제해 예술의 경지로 승화시키는 과정을 지켜보려면 인내심이 요구된다.
어린이들의 꿈과 같은 엉뚱한 이야기들도 이와 같다. “그래, 알았어. 어서 공부나 하시지요, 쉬운 받아쓰기도 제대로 못하면서 화성에 가겠다니... 어이가 없다. 우선 학교에서 좋은 점수를 받도록 노력하자...” 등은 자녀들이 꿈꾸는 것을 막는다. 이렇게 할 수는 없을까. “재미있는 생각이다. 그 다음 이야기도 듣고 싶다. 기다리고 있을게. 우선 지금은 이 산수 문제를 풀고...” 어린이들의 이야기를 재미있게 들어주는 것이 그들의 ‘나’와 꿈을 키워주는 영양소가 된다.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은 무엇일까. 생김새의 다름보다 뚜렷하게 다른 것은 생각의 차이라고 본다. 이것이 개인의 생활철학 기반이 되어서 독특한 개성을 형성한다. 김기덕 감독의 베니스 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은 그 자신의 ‘나’를 인정받은 것이다. 어린이들이 부모 마음대로, 교사 마음대로... 를 벗어나 내 마음대로 생활하며 ‘나’를 키워나갈 때 그들의 꿈도 함께 자란다. ‘나는 나다’ 얼마나 귀한 말인가. 모든 생각의 출발점이며 귀결점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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