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쯤 대부분 미국인들은 미트 롬니의 그 유명한 ‘47%’ 동영상을 보았을 것이다. 지난 봄 플로리다 한 저택에서 열린 백만장자들의 비공개 모금파티를 촬영한 동영상엔 롬니가 뉴욕타임스의 표현처럼 성가신 기자들이 없어 안전하다고 생각한 순간이 담겨있다. 그 ‘안전지대’에서 롬니가 마음놓고 쏟아낸 발언의 하이라이트에는 노골적인 오만과 듣기조차 불편한 냉소가 여과없이 드러나 있다 :
“무슨 일이 있어도 대통령에게 투표하는 47%가 있다. 정부에 의존하는 47%다. 스스로를 피해자라고 생각하며 정부에게 자신들을 돌볼 책임이 있다고 믿고 사람들이다. 의료보험에서 식품, 집, 그리고 무엇이든 다 (정부에서) 받을 자격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다…이들은 소득세를 내지 않아 내 감세공약과는 상관없는 사람들이다…이들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내 일이 아니다. 난 이들에게 스스로 책임을 갖고 자신의 삶을 가꿔가야 한다는 것을 결코 설득시키지 못할 것이다”
동영상을 보았다면 한번쯤 자문했을 것이다 - “난 오바마를 지지하는 무임승차 그룹 47%에 속할까? 아니면 롬니가 백성 삼고 싶어 하는 53%에 낄 수 있을까?”
묻기 전에 정리해야 할 부분이 있다. 여러 미디어와 전문가들이 지적한 롬니 산수의 오류들이다. 세제개혁을 주요공약으로 들고 나온 대선후보가 제시한 숫자들로는 상당히 부실하다.
USA투데이는 그가 소득세를 안내는 47%와 정부혜택을 받는 49%를 혼동했을 뿐 아니라 이 두 그룹을 오바마 지지자들과 한꺼번에 뭉뚱그려 버렸다고 지적한다. 이 세 그룹은 올림픽 로고처럼 각기 일부분만 겹쳐지는 서로 다른 성향이라는 것이다.
미국민의 대부분은 소득세가 아니더라도 급여세와 주 및 지방세, 판매세등을 납부하며 특히 연방소득세를 내지 않는 47% 중 3분의 2는 급여세(payroll tax)를 내고 있다. 그리고 급여세는 연방 세수입의 36%를 차지한다. 그러므로 롬니의 무임승차 47% 산수의 근거는 대단히 부정확하다.
게다가 “소득세 안내는 사람들”로 롬니의 관심권 밖으로 내쳐진 47%의 상당수는 노인과 저소득 백인 근로계층이다. 오바마 지지와는 거리가 먼 전통적인 공화당 표밭, 롬니에게 표를 찍을 사람들이다.
17일 온라인 매체 ‘마더 존스’가 폭로한 동영상 시청의 첫 소감은 솔직히 충격이었다.
우선 수없이 많은 선거에서 수없이 많은 네거티브 전략을 보아왔지만 상대후보가 아닌 유권자를 공격하는 대선후보의 발언을 직접 듣기는 처음이었다. 그것도 국민의 절반을 사회적 기생충처럼 폄훼하는 공개 비하라니…이해하기 힘들었다.
저소득층과 중산층을 위한 정부지원 프로그램에 대한 찬반논쟁이나 비판은 얼마든지 할 수 있다. 그러나 백만장자들 모임에서 그 정책을 의인화 시켜 혜택 받는 사람들을 비하하는 것은 도무지 대선후보 답지 못하다. 자칫 가진 자와 못 가진 자 사이의 계급전쟁을 유발시킬 수 있는 위험한 발상이다. 아마도 47%만이 아닌 53%의 상당수까지 동영상을 보며 어느 순간 모욕을 느꼈을 것이다.
더 충격적인 것은 롬니의 대응이었다. 동영상이 공개된 월요일엔 한밤중 기자회견을 열어 “우아한 표현이 아니었다”고 해명했고, 화요일엔 오바마의 10여년 전 ‘부의 재분배’ 지지발언 거론으로 역공을 시도했으며 수요일엔 “내가 저소득층을 위해 일을 더 잘할 수 있다”는 달래기에 나섰을 뿐이다. 사과를 거부한 채 자신의 발언내용을 계속 옹호하며 번져가는 분노를 방치하고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47%’ 발언은 정치적 ‘실수(gaffe)’가 아니라 롬니의 ‘본색’인가. 진보진영 블로거들이 물 만난 고기들처럼 펄펄 뛰기 시작했다 : “냉담하고 가혹한…롬니의 실체” “드디어 진짜 롬니가 보인다”에서 “정치절벽에 선 롬니” “롬니는 이제 끝났다”에 이르기까지 갖가지 분석과 예언까지 난무한다.
롬니진영엔 초조감이 역력하고 보수 일각에서 조차 비난과 함께 “제발 입 다물라”는 롬니를 향한 질책이 나오는가 하면 일부 공화당 연방의원 후보들은 이미 롬니와의 거리두기를 시작했다는 소식이다. 하지만 물밑 움직임일 뿐 표면상 공화당은 여전히 롬니의 깃발아래서 단합을 과시하고 있다.
표밭도 당장은 별 동요를 보이지 않은 상태다. ‘47% 동영상’의 영향력도 지금으로선 가늠하기 힘들다. 민주당의 희망과는 달리 ‘후보 롬니의 부음’을 쓰기는 아직 이르다는 뜻이다.
그러나 지지율이 여전히 오바마에게 뒤져 있어 갈 길 바쁜 롬니가 ‘47%’ 해명에 아까운 시간과 에너지를 계속 쏟아 부어야 하는 것도 보통 일은 아니다. 큰 이슈가 떠오르지 않아 오는 주말 선데이 시사토크쇼까지 47%가 화제로 오른다면 롬니의 전세는 더욱 불리해진다. 10월초 첫 TV공개토론에서 오바마를 넉다운 시킨다면 만회의 계기를 잡을 수 있겠지만 ‘웅변가’ 오바마에 압승? 그게 어디 쉬운 일인가…
‘롬니 본색’이 온라인·오프라인 미디어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오늘, 선거까진 47일 남았다. 국민의 절반을 “세금도 안내면서 정부에 기대어 살려는 무책임한 집단”으로 내친 후보도 승리할 수 있을까, 11월 대선의 결과가 몹시 궁금해진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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