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업이 기울어 접어야 했던 적이 있었다. 우리는 뉴욕에서의 복귀를 포기하고 친척들이 있는 워싱턴으로의 이주를 고민하게 되었다. 가난한 유학생활부터 시작한 뉴욕은 아이들에겐 홈타운이자 어른들에게도 추억이 오롯한 땅이었기에 결정은 쉽지가 않았다.
이사 오던 날 아침, 이삿짐 트럭의 뒤쪽에 식탁의자들을 뒤집어 싣는 것을 마지막으로 모든 준비는 끝이 났다. 차가 떠나기 전, 못내 아쉬웠던 나는 빈 집안을 한번 둘러보았다. 물건들이 빠져나간 실내는 적막했다. 아이들이 재잘거리며 자라던 거실도, 밤이면 뜰을 건너온 푸른 달빛이 베갯머리를 기웃거리던 침실도, 아직 덜 자란 막내에겐 가파르기만 했던 열 몇 개의 계단도 침묵 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아침햇살이 비스듬한 각도로 창턱을 넘어 들고 있는 집을 등지고 나오며 와락 눈물이 쏟아졌다. 차가 출발하자 뜰의 한구석에서 막 피어나기 시작하던 코스모스 연분홍 꽃들이 차례로 내 눈물에 풀어지며 멀어져갔다.
워싱턴으로 오는 하이웨이에서 지루해 하던 아이들은 서로 기댄 채 낯선 잠으로 빠져들었다. 싫다고 도리질치는 아이들을 친구들과 떼어놓으며 옮겨간다는 자책감에 자꾸 뒷자리의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나는 울적한 마음을 달랠 겸 가방 안에서 성경을 꺼냈다. 무심코 펼쳐본 성경의 한가운데에 하얀 봉투가 하나 끼어 있었다. 앞뒤를 훑어보아도 누구라 이름을 남겨 놓지 않은 봉투 안에는 이별의 인사치고는 꽤 많은 양의 돈이 들어 있었다. 누굴까, 누구였을까. 나는 재빠르게 기억을 더듬기 시작했다.
우리가 살던 스트릿에 한국인들이 늘어나면서 나는 현관문을 잠그지 않고 사는 날이 많았었다. 아이들 셋이 고만고만하여 번번이 문을 열어주기도 힘들었지만 불쑥 찾아드는 사람들에 대한 반가움 때문이었다. 빠금히 문을 열고 나타나는 사람들이 좋았고 집이 비었을 땐 현관 안 신발장 위나 계단 위에 놓고 가는 아직 따뜻한 온기의 음식들도 정겨웠다.
봉투의 주인은 이사 오기 전날 방문한 몇몇 지인들 중 한사람으로 짐작되었다. 나는 긴 생각에 잠겨 차창 밖으로 흘러가는 95번 도로변의 숲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가을이 오고 있었다. 아직은 가지마다 잎사귀들을 단단히 붙잡고 있는 나무들이 푸른 강물처럼 내 귓전으로 흘러갔다. 소식 없이 오는 친구가 더 반갑듯이 누구라 말하지 않은 그 사람의 마음이 골절로 뭉클하게 전해져오는 순간이었다.
워싱턴은 온통 낯선 것 투성이었다. 뉴욕보다 넓어 보이는 하늘도 낯설고 그 하늘로 숱하게 날아오르는 새떼들마저 낯이 설었다. 처음 가보는 거리에서 새로운 일거리를 찾아보다 집으로 돌아오는 일은 지치고 힘든 일이었다. 집으로 들어서면 옹기종기 비좁게 자리 잡은 가구들한테서도 위안이 느껴졌다. 손때 묻은 가구 위에는 가족사진들이 나란했고 벽시계도 같은 소리를 내며 나를 반겼다. 방수가 모자라 아이들이 함께 잠든 방문을 열어보면 이층침대에서 잠들기엔 너무 커버린 아이의 긴 다리가 안쓰러웠다.
이제 이곳으로 이사 온 지도 꼭 열두 해째가 되고 있다. 나는 새벽에 떠오르는 해를 이마로 맞으며 출근하여 일몰에 머리칼을 적시며 퇴근해오는 일상을 지칠 줄도 모른 채 반복해 왔다. 사업은 안정궤도에 올라 탄탄해졌고 아이들도 마디마디 훌쩍 커버려 한 아이는 뉴욕으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내 곁에 있다. 그리고 계절은 다시 가을을 향해 가고 있다.
꽃이 피고 지는데도 순서가 있고 별이 뜨고 지는데도 차례가 있는 법이라 했던가. 나는 지금 서른아홉 해 빛나던 여자로서의 나이를 막 마감하고 있는 중이다. 열다섯 살의 늦여름, 뒤란에 맨드라미와 봉숭아꽃이 피어 있던 그 무렵에 나는 초경을 치렀다. 엄마는 그날 저녁 밥솥의 가장자리에 흰 쌀을 넉넉히 안쳐 내게만 하얀 쌀밥을 소복하게 퍼주셨다. 그 저녁, 마당 끝에는 밥사발을 닮은 하얀 수국이 달처럼 피어 있었고 나는 어둠이 내린 뒤에도 한참이나 뒤란 장독대 옆에 가만히 앉아 있었던 것 같다.
그 여름꽃 내음처럼 비릿하고 아렸던 마음의 통증이 서른아홉 해만에 다시 나를 찾아왔다. 나는 지금 그 열다섯 계집아이처럼 조금 슬프다. 흔들리는 이파리 하나에도, 떨어져버린 꽃잎 한 장에도 자꾸 마음을 빼앗긴다. 밀떡에 맨드라미 꽃물을 들여 주시던 어머니도 그립고 손톱에 꽃물을 들여 주시던 할머니도 생각난다. 삶은 고운 꽃물을 상상하며 무명실 감은 손가락의 아린 통증과 함께 한밤을 건너오는 일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르거늘…. 마디마다 걱정은 깊고 밤이 길다 푸념했었다.
완경이라는 말이 생겼다. 폐경이란 말의 닫힌 의미를 여성성의 완성으로 새롭게 바꾸어 표현하는 낱말이다. 여성의 평균나이로 친다면 대략 삶의 7할 밖에 살지 않은 나이이니 남은 3할의 시간들을 새롭게 피어보라는 의미로 받아들이면 될 것 같다. 좀 더 따뜻한 여성성을 갖고 사물과 사람을 품어 사랑하며 살라는 뜻으로 여겨진다.
책장을 정리하다 예전의 성경책을 발견했다, 시력이 떨어져 큰 활자의 새 책으로 바꾼 뒤 책장으로 밀려나 있던 성경을 펼치니 갈피에 여전히 그 빈 봉투가 들어 있다. 그 봉투를 끼워 두었던 분은 지금 캄보디아의 어린이들에게 가 계시다. 우물이 없어 흙탕물을 마시고 사는 가난한 아이들 곁에서 생을 마무리하고 싶으시다 한다.
생각하면 나는 많은 빚을 지며 살아왔다. 내겐 채워 돌려줘야 할 빈 봉투가 너무 많다는 이야기이다. 뒤란 양지바른 곳을 골라 부끄러운 빨래를 널어주시던 어머니로부터 시작하여 첫아이를 진통하는 긴 시간 내내 곁에 있어 주었던 어느 흑인간호사, 이사할 때마다 이웃해 살았던 많은 사람들, 그리고 산골아이의 손에도 작은 성경책을 선물해 주었던 기드온이라는 단체와 배고픈 학교에 옥수수 빵을 공급해 주었던 사람들…. 빚의 목록은 너무나 길고 내 앞에 남아 있는 시간은 그 모든 빚을 갚고 살기에는 그리 충분치 않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 빈 봉투를 가방에 넣고 서둘러 집을 나선다. 이미 가을은 낯선 이국소녀가 얼굴을 비춰볼지도 모르는 그 우물 같은 표정으로 하늘 한복판까지 당도해 있다.(pinkmd411@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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