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9년쯤 되는 것 같다. 그때 강원도 오대산을 가기 위하여 서울 마장동 버스 정류장에서 꼭두 새벽부터 기다리고 있었다. 두시간도 더 넘게 기다려 강릉행 버스를 탈수 있었다.
필자는 그때 오대산 상원사에서 겨울안거(음력 10월15일ㅡ다음해 1월15일)를 하러가던 중이었다. 터덜거리고 굴곡이 심한 비포장길을 일곱시간을 타고나서야 월정사 입구에 내렸다. 내리고보니 온몸 구석구석 할 것없이 입안까지 먼지투성이었다. 그래도 큰 일이나 한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해 겨울에는 필자를 비롯하여 십오명의 수행승들이 상원사에 모여와서 겨울안거 결제를 했었다. 생각해보면 그때 상원사의 겨울 추위는 매서웠다 뼈속까지 파고드는 추위로 몸을 운신하기조차 힘들 지경이었다.
덕분에 필자도 감기에 걸려 간병실에 혼자 있으면서 좌선을 하고 있을 때였다. 어느날 초 저녁쯤이나 해서 누군가 방문을 흔들고 있었다.“뉘십니까, 밖에 뉘시요?”그러자“잔소리 그만하고 문이나 열라우.”걸걸한 목청으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이 추위에 누군가! 처음 듣는 목소리였다. 필자가 문을 열고 내다보니 웬 사천왕 같은 청년 한사람이 어깨에는 총을 메고 있었다.“사냥하시는 분이시군요?”“잔소리 그만하고 나와보라우.”
이상한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면서 밖으로 나가자 필자를 식당채로 데리고 갔다.‘뭐하는 사람일까!’안으로 들어가보니 다른 스님들도 잡혀와 긴장들을 하고 앉아 있었다.
아뿔사! 필자는 그때서야 뒷골이 섬칫하며 심상치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감지할 수 있었다. 알고보니 북에서 온 무장 특수부대에게 스님들이 감금당한 상태였다. 그들 십여명이서 스님들을 둘러싸고 있으면서 저들 역시 긴장된 모습들이었다.
마지막으로 필자가 잡혀가자 곧바로 재판 아닌 재판이 시작됐다. 앞에 있는 스님들을 어찌 처리할 것인가에 대한 의논들이 분분했다. 하나마나 뻔한 일이었다. 결국에는 스님들을 죽이고 가는 것이 저들이 안전하다는 쪽으로 합의되어지고 있었다.
이렇게 죽는 것인가, 꿈을 꾸는 듯 실감이 나지 않았다. 그때 시종 말없이 앉아있던 그들의 지휘관 같은 사람이 입을 열었다.“동무들 심각하게 처리 하시기요”하면서 방향을 트는 듯 했다.
“정녕 저들의 총에 죽는단 말인가, 허다한 수행처 다 놔두고 찾아온 것이 겨우 죽을자리 찾아온 것이란 말인가?”후회스러움에 억장이 무너져 내렸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뾰족한 수가 없어 보였다.“앞상 받아논 죽음이었다.”하늘로 날아갈 수도 없고 땅 아래로 빠져날 틈도 없고 어차피 죽을 바에는 수행자답게 조용히 죽음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만감이 교차했다. 눈감으니 지나간 추억들이 주마등 같이 지나가고 있었다. 가슴이 저려왔다.
필자는 내생에도 불심이 돈독한 가정에 태어나서 출가승려 되어 이생에 못다한 수행을 하고 싶었다. 염원하고 또 염원했다. 그리고 이생의 마지막 길을 선정삼매에 들어서 가고 싶었다. 필자는 한쪽으로 물러나서 가부좌를 하고 앉아 잠시 숨을 고르고나서 선정삼매에 들어갔다.
숨결은 세밀해져서 서서히 안정되어져오고 마음은 고요하고 고요하여 점점 깊어지고 있었다. 드디어 유무생사 등 모든 구속으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벗어난 최후의 끝자락에서 맑고 밝은 각체만 여실히 드러났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누군가 필자의 몸을 흔들고 있는 것 같았다.
“법일 스님, 눈 좀 떠봐요.” 하는 소리가 아득히 들려오는 듯했다. 잠시후 더 큰소리가 들렸다.“우리가 다 살게 됐으니 눈 좀 떠봐요”하는 소리가 가까이에서 들리고 있었다. 가만 있자 내가 아직 살아있는 것인가! 그 순간부터 선정삼매에서 나오고 있었다.
그런데 누군가 필자의 손을 잡고 있는 것을 느꼈다.“스님 선생님 그 눈좀 떠 보시라요. 이 판국에 웬 잠을 그리 하십니까?”그는 필자가 잠자고 있는 줄로만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가 어찌 선수행의 오묘함을 알 수 있겠는가!
필자가 눈을 떴다. 내손을 잡은 자는 다름아닌 저들의 지휘관이었다. 절집 수행자 같이 온화한 인상으로 기억난다. 다행히 그가 있어 스님들 모두가 목숨을 보존하게 되어 한시름 놓은 기분들이었다. 그런데 다된 밥에 재뿌린다고 한 스님이 간 떨어지는 소리를 했다.
“당신들이 떠나면 이 나라의 법에 따라 군부대에가서 신고해야 합니다” 하고 있었다. 가슴이 내려않고 심장이 멈추는 듯했다.“아뿔싸 저 화상이 우리를 죽이는구나.”순간 모든 시선이 저들의 지휘관에게 집중되고 있었다. 죽느냐 사느냐 폭풍전야와 같은 고요가 숨을 막히게 했다.
그렇게 피말리는 고요가 십분쯤이나 지났을까! 지휘관 그가 입을 열었다.“솔직해서 좋습네다. 내래 스님 선생님들의 사정쯤 잘 알고 있습네다. 신고해도 좋슴네다.”이게 무슨 소린가. 필자의 귀를 의심했다.
“단지 우리가 떠난지 하루쯤 뒤에 신고하시라요.”여기에 반대할 자 누구인가. 스님들 모두가 그리하겠노라고 약속했다.“그럼 스님 선생님들을 믿겠습네다.” 필자와 지휘관이 다시 한번 손을 잡고 어설픈 웃음을 하고 있었다. 그
런데 이번에는 저쪽의 지휘관이 엉뚱한 요구를 했다. 저들이 스님들 소지품을 뒤질 때, 필자가 소지하고 있는 국악기인 단소를 보고나서 그 소리를 듣고 싶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도 기타를 치는 사람이라고 밝혔다. 분위기상 탐탁치는 않았으나 필자의 입장에서는 거절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단소를 꺼내들고 앉았으니 감회가 어려오고 있었다. 지금 살아있다는 자체만으로도 다행이고 행복이었다. 부귀영화가 무슨 필요 있겠는가! 필자는 단소 독주곡인 고요하고 청아한 청성곡을 불었다. 잠시 불다가 보니 너무 조용한 감이 들어 다시 아리랑으로 바꾸어 불었다. 그러자 스님이나 저들이나 할 것 없이 모두가 아리랑 노래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목청들이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오대산이 무너져라 아리랑을 노래하면서, 수없이 반복하고 다시 또 반복했다. 어느새 필자의 코끝이 매워오고 가슴이 뭉클해져왔다. 어찌 필자일 뿐이랴, 모두의 가슴은 아픔에 에어지고 있을 것이다.
이렇게 한풀이를 하고나서야 그들은 떠나갈 채비를 했다. 스님들은 빨아놓았던 내복과 주먹밥을 만들어서 주었고 쌀 한가마를 내주었다. 그들은 각자 분배하여 나누어 지고 어둠속으로 사라져갔다.“하룻밤이 백일 같은 긴 밤이었다.”
그들이 떠나자 스님들은 곧바로 회의에 들어갔다. 그들과의 약속을 응당 지켜주는 것이 수행자의 도리라는 생각과 국법을 지켜야 한다는 생각이 서로 팽팽하여 두시간여를 보냈다. 현실은 국법을 어길 수는 없었다. 스님들은 날이 새기도 전에 눈쌓인 길을 내려가 군부대에 신고해서 그날로 저들은 소탕하게 됐다. 그
러나 스님들의 목숨을 해하지 않고 믿고 떠난 그들과 지휘관에게, 배반 아닌 배반을 하게 됐다는 사실이 스님들 모두의 마음을 무겁게 억누루고 있었다. 오늘 백중날 아침에 그들의 혼백이 이고득락 하기를 빈다. 그리고 언젠가는 남북의 벽이 무너지면 장안사도 가보고 싶고 묘향산도 가보고 싶다. 금강산 일만이천 봉위에 올라 단소로 아리랑을 불어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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