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 시절에 동네 어른들은 “한글을 깨우치고 구구단을 암기할 수 있으면 된다”라는 말씀들을 자주 하셨다. 그 정도면 시골에서 농사꾼으로 살아가기에 충분하다는 이야기다. 학교에서나 집에서도 대체로 그런 분위기여서 방과 후에는 집에 오자마자 책가방을 마루에 내 팽개치고 또래들과 어울려 어두워질 때까지 산과, 들과 바닷가를 쏘다니며 실컷 뛰어놀 수 있었던 것이 아직도 일생 중 가장 행복했던 추억으로 남아 있다.
그렇지만 간간이 잔심부름도 하고 집안일을 도와야 하는 게 농촌생활인데, 지금 기억으로 가장 하기 싫었던 일이 집안에 있는 석유 등잔들을 점검하고 석유를 채워 넣는 일이었던 것 같다. 또한 자주 있는 일은 아니지만, 가끔 아버지의 부름으로 먹갈이를 하는 경우이다. 이 두 가지의 공통점은 아무리 조심을 해도 손에 석유나 먹물이 묻는 것을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먹물을 안 묻히려고 조심은 하지만 아차 하는 순간 먹물이 튀어 손이나 옷에 묻게 되면 잘 지워지지 않아서 여간 귀찮은 일이 아니었다.
그럴 때 아버지께서 한자 한자 설명하시며 자주 말씀하시던 사자성어로 ‘“근주자적 근묵자흑’(近朱者赤 近墨者黑)이라는 게 있었다. 그 당시에는 빨리 먹갈이를 마무리하고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친구들과 어울려 놀 생각만 머릿속에 가득해 한 귀로 듣고 다른 귀로 흘려버리곤 했었다. 중국 고전에 나오는 글로 붉은 인주를 자주 접하게 되면 붉은 색으로, 검은 먹을 자주 접촉하게 되면 검은 색으로 물드는 것 같이 훌륭한 스승을 만나면 자연스럽게 스승을 닮게 되고 나쁜 무리와 어울리면 자신도 모르게 나쁜 방향으로 가게 된다는 것을 일깨우는 구절이다.
얼마 전 신문에 나온 사진 한 장이 시선을 끌었다. LA 한인타운의 중심가인 올림픽가에 두 대의 대형 버스가 주차해 손님을 기다리고 있는 사진이다. LA 인근의 카지노에 가는 버스로 한인타운 노인들이 주 고객이라 한다. 버스비도 주고, 점심 쿠폰도 주고, 소액의 도박자금도 준다니 낮 동안에 돈도 안 들이고 시원한 카지노에서 소일하기에는 제격이라 한다.
그러나 자주 이용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점점 빠져들어 자녀들이 드린 용돈이나 생활비로 나온 정부 보조금까지 도박에 탕진하는 사례도 종종 일어난다고 한다. 그런 환경에 자주 접하다보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오염될 수밖에 없다. ‘근묵자흑’을 떠올리게 된다.
은퇴 후. 여가를 보내는 방법은 개인별 취향에 따라 여러 가지로 다양할 수밖에 없는데, 가끔은 도서관이나 박물관, 미술관 등을 정기적으로 찾아가서 소일 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LA 한인 타운인근에는 30분 안에 도착할 수 있는 훌륭한 공공시설들이 많이 있다. LA 다운타운에 있는 중앙도서관을 위시하여 여러 지역에 도서관이 산재해 있어 이용할 수 있고, 한인 타운에서 3~4마일 서쪽에는 LA카운티 미술관(LACMA)이 있고, 더 서쪽으로는 게티센터와 UCLA 미술관이 있다.
이밖에도 소장품과 기획 전시의 수준이 세계적인 훌륭한 시설들이 많다. 멀리 사는 사람들은 자주 들르고 싶어도 거리 관계상 어려운 일인데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한인 타운에 거주하는 분들은 커다란 혜택을 받은 셈이다.
그러나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고, 이러한 훌륭한 공공시설도 활용치 못한다면 별 의미가 없는 일이다. 마침 타운인근의 LA카운티 미술관에는 화제가 되었던 설치 작품인 ‘공중에 부양된 바위덩어리’(Leviated Mass)가 완성되어 지난 6월 말부터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고 한다. 몇 개월 전 그 근처를 지나면서 가림 막에 싸인 집채만 한 바위덩어리를 멀리서 보고 지나갔는데, 일반 공개 후 뉴스 사진으로만 보고 아직 가보진 못했다. 평소 마음은 있었지만 이런 저런 사유로 미술관 나들이를 미루어 왔던 사람들에게 보낸 큼직한 초대장이라 볼 수 있다.
숲속을 걷기만 해도 건강에 유익을 주는 산림욕 효과가 있다고 한다. 카지노 나들이도 시간 보내기에 좋겠지만 가끔은 서가에 가득한 책들 사이를 기웃 거려 보거나, 훌륭한 예술작품들이 전시된 공간을 자주 접촉해 보며 어떤 변화가 있을지 자기 자신을 시험해보자. ‘근주자적’이라 하지 않았던가.
<인신환 건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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