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또’ 총기난사 참극이 발생했다. 24세의 대학원생이 마구 쏘아댄 반자동 소총과 산탄총, 권총 등에 12명이 죽고 58명이 부상당했다. 학교와 쇼핑몰, 직장과 교회, 식당과 헬스클럽에 이어 이번엔 한 밤중 관객이 들어 찬 극장 안이다. 이젠 정말 무차별 난사의 총구를 피할 안전지대가 따로 없다.
그래도 미국엔 ‘대책’이 없다. 아니 세우려 하지 않는다. 희생자에 대한 ‘애도’의 말만 있을 뿐 머지않아 틀림없이 또 발생할 총기난사에 의한 대량학살을 예방할 ‘대책’ 마련엔 정치가도, 여론도 고개를 돌린다.
지난 20일 콜로라도 주 오로라에서 발생한 난사사건의 정황이 주는 기시감은 섬뜩할 만큼 생생하다. 기시감은 “이미 보았던”이란 뜻의 불어 데자뷔(D?j? Vu)에서 나온 말로 처음 보는 것인데도 이전에 같은 것을 본 듯한 느낌을 받는 현상을 말한다.
왜 아니겠는가. 1999년 콜럼바인 고교에서부터 2007년 버지나아텍 대학, 2009년 포트후드 기지, 2011년 투산의 수퍼마켓 주차장, 그리고 지난 4월 북가주 오이스코 대학 강의실에 이르기까지 정신이 불안정한 외톨이들이 자신의 좌절감을 총구로 분출시킨 현장과 그 참극이 발생하기까지의 배경은 끔찍하게 닮아 있다.
판사가 정신질환 치료를 명했었던 조승희는 사생활보호 연방법 덕에 치료는 받지 않은 채, 버지니아 주의 느슨한 총기규제법 덕에 32명을 살해한 2정의 총기를 합법적으로 구입할 수 있었다. 투산 커뮤니티 칼리지의 제렛 러프너의 평소 행동은 공포감을 줄 정도여서 그가 강의실에 있으면 학생들은 여차하면 도망가기 위해 문 가까이에 앉았다고 한다. 학교에선 퇴학당했지만 총을 사는 데는 아무 문제없었던 그가 난사한 총탄에 6명이 생명을 잃었고 현직 연방하원이 중상을 당했다.
합리적 사회라면 이미 오래전 더 이상의 참사를 막는 조처가 취해졌어야 한다. 총을 든 미치광이에 의한 대형 참사는 다른 나라에서도 발생한다. 그러나 다른 나라들은 재발을 막기 위한 대책을 강구한다. 1996년 호주에서도 35명을 살해한 총기난사사건이 발생했다. 호주연방정부는 각 지역정부를 설득해 강력한 총기규제법을 추진했다. 97년 통과된 총기법에 의해 전국적 총기등록이 의무화되고 일부 공격용 총기는 불법화되는 등 규제가 대폭 강화되었다. 1979년~1996년 13건이나 발생했던 호주의 대량살해 난사사건은 이후 16년 동안 한 번도 발생하지 않았다.
국가적 참사가 발생하면 공식반응은 기본적으로 두 단계로 공표된다고 워싱턴포스트는 설명한다. 첫째는 희생자에 대한 위로와 애도, 둘째는 재발 방지를 위한 대책 추진이다. 미국에서도 그래 왔다. 태풍이나 홍수 같은 자연 재난에도, 9.11 같은 테러공격 때도 먼저 희생자를 위로한 후 예방을 위한 대책을 수립했다. 그런데 총기사건만은 예외다. 그처럼 끔찍한 사건이 그처럼 빈번하게 발생해도 정치권은 심심한 위로에서 그칠 뿐 실질적 대책은 마련하지 않았다.
결국 흐지부지 되긴 했지만 버지니아텍과 투산 난사사건 이후엔 전국적 충격으로 총기규제가 잠시나마 추진되고 총기논쟁이 뜨겁게 가열되기도 했었는데 이번엔 그마저 시들하다. 엄청난 자금력과 400만 회원을 앞세운 전미총기협회(NRA)의 막강파워에 주눅 들고 총기에 집착하는 여론의 눈치 보며 양당 대선후보를 비롯한 정치인 대부분이 총기규제엔 언급조차 꺼려하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총기규제 입법화는 없을 것”이라는 미디어의 예언(?)만 무성하다.
유럽언론들의 지적처럼 미국에서의 총기규제는 너무 늦었는지도 모른다. 인구 1인당 1정 꼴로 미 전국에 나도는 수많은 총기를 압수 내지 수거하는 것은 이미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리고 개인의 총기소지는 헌법이 보장하는 기본권으로 인정받았다. 극우보수파들은 탄환을 대량 장전할 수 있는 고성능 탄창 등 공격용 무기 규제도 “자유에 대한 제한”이라며 극구 반대한다.
뉴욕타임스는 “정확하게 무엇을 하는 자유인가? 재장전 없이 100발을 연속 발사하는 자유?”라고 반문하며 질책했고 USA투데이는 “수백만 준법시민들에게 총기를 책임 있게 소유·사용할 수 있는 권한을 허용하는 대가로 매년 수만명의 총기희생을 감수하기로 한?악마의 거래”라고 미국의 총기법을 비유했다.
물론 어떤 규제법도 총기범죄를 완전히 막지는 못한다. 그렇다고 속수무책일 수는 없다. 개인의 총기소유권을 지지하는 여론도 공격용 무기에 대한 규제는 지지한다. 이번사건의 범인이 손쉽게 구입했던 반자동 소총이나 탄약 100발을 장전하고 1분에 60발씩 연속 발사할 수 있는 고성능 탄창 등의 판매를 금지시키고 아무런 배경 체크없이 6,000개의 탄환을 살 수 있는 온라인 판매를 제한하는 등의 규제만 실현시킨다 해도 희생자는 많이 줄어들 수 있다.
그러나 미국의 정치가들은 그런 정도 규제의 입법화조차 시도하지 않을 것이다. 선거를 몇 달 앞둔 요즘엔 더더욱 외면할 것이다. 그러는 동안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미국 어디에선가 매일 90명의 사람들이 총에 맞아 숨질 것이다. 그중엔 캠핑 갔다 여동생이 잘못 쏜 장총에 맞아 숨진 10세 소년, 부부사움 하다 아내의 총에 맞아 죽은 한인 목사, 쇼핑몰에서 권총 자살한 한인 컴퓨터 강사도 포함되어 있다. ‘총의 천국’ 미국에 있지 않았더라면 아직 살아있을 사람들이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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