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명욱 객원논설위원
고통을 당해보지 않은 사람은 고통을 모른다. 한 번도 고문을 당해보지는 않았지만 고문만큼 고통 중에 있어본 적은 있다. 암에 걸린 환자들이 항암치료를 할 때 당하는 고통은 아마도 고문 이상가리만큼 큰 것일 게다. 얼마나 약이 세면 머리카락이 다 빠져버릴까. 생명줄을 놓지 않고 더 살아보려고 하는 희망이 그 고통을 감수하게 한다.
고통은 대략 세 가지로 온다. 육체적인 고통, 정신적인 고통, 마음적인 고통 등이다. 육체적인 고통은 대개의 경우 병으로 생긴다. 질병이 몸에 들어와 발생되어지는 육체적 고통은 병만 낳으면 없어지는 고통이다. 문제는 병의 상태가 치유되지 않고 심각해 질 때 고통도 더 심해진다. 진통제가 있지만 진통제의 효력은 그 때 뿐이다.
사람의 몸은 신비 그 자체지만 언제 어디서 이상이 생길는지 알 수 없다. 우선 인체의 복잡한 구조를 보면 혈관의 길이는 12만 킬로미터(Km)로 지구를 세 바퀴 돌 수 있고 폐에 있는 공기주머니는 모두 3백만 개, 심장은 하루에 300리터의 피를 뿜어 올린다. 특히, 뇌는 1000억개의 신경세포와 1천조개의 신경세포 접합부를 가지고 있다.
우주왕복선은 5백만개의 부속품이 필요하지만 사람의 몸에는 100조개의 세포가 필요하고 25조개의 적혈구와 250억개의 백혈구가 있다. 혀에는 9000개 이상의 미각세포가 있다. 3일마다 위벽이 새 것으로 바뀌며 피부는 천연방조제로 4주마다 한 번씩 변한다. 하루 120평방미터의 공기를 마시고 2,340번 숨을 쉬며 생명을 지탱한다.
여기에 사람의 몸과 함께 하는 마음과 정신을 더 부가시키면 우주에 사람의 인체만큼 정교한 것도 없다. 이렇듯 인간은 상상을 초월한 신비의 몸을 갖고 있으며, 그래서 인간을 소우주라고도 부르지 않던가. 하지만 이런 몸도 병이 생기거나 사고로 탈이 나면 힘없이 망가지고 그에 따르는 고통은 온 몸으로 번지며 사망에 이르게 된다.
어떤 친구가 있다. 그 친구는 아침을 거르는 버릇이 있다. 그저 과일로 된 주스를 한 잔 마신 후 몸에 좋다는 비타민 등을 7알 정도를 먹는다. 그리고 오전 11시 정도에 아점(아침과 점심으로 먹는 끼니)을 먹는다. 이렇게 잘 지내던 그는 어느 날 갑자기 복통을 일으키며 몇 날을 진통제로 지내고 결국은 빈속의 비타민 섭취를 끊게 된다.
친구 왈 “차라리 조용히 죽는 편이 나을 정도로 고통스러웠다”며 “몸에 좋다는 비타민도 식사 후에 먹어야지 빈속에 먹다간 위장이 탈이나 안 먹는 만 못하다”고. 얼마나 고통스러웠으면 죽음까지도 생각했을까.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하다 진실이 아닌 것을 진실이라고 토해버리고 고문을 멈추게 하는 사람들의 그 고통도 이런 것일까.
고통의 철학이란 게 있다. 라이프니치는 고통을 “궁극적 선을 이루기 위한 신의 섭리가 실현되는 과정”이라 본다. 칸트는 “고통은 쾌락의 전제가 되고 쾌락과 쾌락 사이에 개입하여 건강을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아니 될 요소”라 본다. 레비나스는 “고통은 자신의 수용범위를 넘는 그 어떤 것으로 타인의 도움에 대한 요청이 깔려있다”고 본다.
고통이 지나면 더 성숙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고통을 통해 자신과 타인, 죽음도 생각해 볼 수 있으니 그럴 것이다. 칸트의 경우 고통이 없다면 즐거움도 없을 것이요, 라이프니치의 경우 고통은 인간에게 유익을 가져다주며 더 좋은 미래로 나아가는 통로가 되는 것이요, 레비나스의 경우 타인의 고통에도 귀를 기울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어쩌면 인간에게 있어 고통은 동전의 한 면(한 면은 즐거움)같은 것이다. 육체적 고통을 포함한 정신적, 마음의 고통은 인생의 질을 고양시키는 삶의 단백질과 같은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고통의 끝은 어디일까. 고통의 끝은 바로 죽음? “이대로 고통스럽지 않게 죽을 수만 있어도 좋겠다”는 고통 중 뒹굴던 친구의 고백이 들려온다.
가끔 고통이란 명제를 생각하며 예수가 달린 십자가상의 처형을 그려보곤 한다. 예수의 마지막 절규는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마15:34)였다. 뜻은 “나의하나님, 나의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이다. 고통의 정점이자 극이다. 그러나, “No Cross No Crown!”. 고난의 십자가가 없으면 영광의 면류관도 없다 했듯이 예수의 십자가는 곧 부활로 이어짐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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