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미역사상 200년 만에 50세 최연소 연방대법원장으로 취임하며 존 로버츠가 다짐한 것은 대법원의 이념전쟁 종식이었다. 그는 9명 대법관들의 헌법 해석이 개인의 가치관에 따라 갈리지 않는 만장일치 판결과 선판례에 대한 존중을 강조했다. 자신의 역할은 경기의 새 규칙을 만드는 게 아니라 기존 규칙을 적용하는 야구심판이라는 비유까지 했다.
지난 7년 주요이슈 판결 때마다 전국민의 관심권에 들어왔던 ‘존 로버츠의 대법원’은 그러나 그의 다짐과 달랐다. 특히 2006년 강경보수 새뮤얼 얼리토 대법관의 입성이후 6번 회기동안 선거자금제한법, 총기규제법, 낙태관련법, 어퍼머티브액션 등에 줄줄이 내린 위헌 판정을 통해 대법원은 공화당 대통령이 지명한 5명 대법관의 강력한 보수성향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이들이 4명의 진보대법관과 팽팽히 맞서는 대법원의 양극화는 워싱턴 정계를 무색케 했다.
80년대만 해도 66%를 기록했던 대법원 지지율이 40%대로 곤두박질친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대법관들이 법적 해석에만 의거해 판결한다고 믿는 미국인은 8명 중 한명에 불과하게 되었다. 작년 10월 2011~2012년 회기가 시작되면서 대법원에 대한 우려는 더욱 고조되었다. 국론을 양분시켜온 ‘시한폭탄’을 안고 있었기 때문이다.
2010년 표밭의 반란을 주도한 극우보수 ‘티 파티’ 물결의 동력이 된 오바마 대통령의 헬스케어개혁법과 불법체류자를 형사범으로 체포하겠다는 애리조나의 반이민단속법 - 보수진영과 오바마 행정부가 겨루는 가장 뜨거운 두 가지 정치 이슈가 한꺼번에 올라온 것이다.
법전문가 상당수는 사법부의 전통과 판례를 근거로 헬스케어의 합헌과 이민법의 위헌 등 행정부의 승리를 추론했으나 정계는 5대4의 양극화 판결로 보수가 승리할 것이라는 추측과 예상이 난무했다.
들뜬 보수진영은 ‘시한폭탄’이 오바마케어 부음을 알리는 축포가 될 것으로 확신했고, 각오한 진보진영에선 대법원공격 캠페인이 시들해진 진보표밭을 결집시킬 촉매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예상은 뒤엎어졌다. 지난주 대법원은 사흘 간격으로 ‘역사적 판결’을 탄생시켰다. 월요일의 이민법 ‘위헌’ 판정도 예상 밖이었지만, 전국 모든 신문에 통단제목을 장식하며 충격을 던져준 것은 회기 마지막 날인 목요일의 헬스케어 개혁법 ‘합헌’ 판결이었다.
지난주의 대법원은 더 이상 스윙 보터 앤소니 케네디의 심중에 촉각을 기울여온 ‘케네디의 법정’이 아니었다. 스스로 좌와 우의 이념을 뛰어 넘는(이번만이라 해도) 모범을 보인 대법원장 ‘로버츠의 대법원’이었다.
판결에 대한 즉각 반응은 뜨겁고 거칠었다. 진보진영의 ‘새로운 연인’으로 떠오른 “용기있고 소신 강한 대법원장”에겐 온갖 찬사가 바쳐졌고 “겁쟁이 대법원장의 배신”엔 극우보수로 부터 분노의 공격이 쏟아졌다. 반응은 이번 주 들어서야 조금씩 정리되었다. 승리에 환호하던 오바마진영은 보수의 분노가 결집하는 표밭의 역풍을 우려하기 시작했고 중도보수는 로버츠의 판결이 궁극적으로는 보수진영이 오랫동안 추구해온 연방정부 경제규제권 제동의 길을 열어줄 것이라는 ‘위안’을 발견해냈다.
로버츠가 ‘각 주간 통상을 규제할 수 있는 연방정부의 권한(commerce clause)’을 합헌의 근거로 삼은 것이 아니라 보험 미가입자에 대한 ‘벌금’을 ‘세금’으로 해석, ‘연방정부의 과세권한’을 근거로 합헌 판결을 내렸기 때문이다. 로버츠의 판결이 과연 장기적으로는 연방권한을 강력히 제한하게 될 보수의 승리일까. 헬스케어 같은 케이스는 수십년만에 한번 나올법한 판결이니 글쎄, 아직 누구도 알 수 없다. 먼 훗날의 싸움에서 다시 평가해 볼 일이다.
‘프로페셔널 공화당’으로 확실한 보수인 로버츠가 왜 진보에 가담해 오바마케어를 살려냈는지 정확한 이유도 본인이 입을 굳게 다물고 있으니 알 수가 없다. 그의 판결문과 대법원이 처한 현재 상황을 미루어 “치열한 선거환경과 관계없이 대법원은 독립된 기관이며 헌법의 충실한 시행자다, 대법원은 이념의 양극화에 편승해 어느 한 정당을 편드는 포럼이 아니다”라는 로버츠의 메시지를 짐작할 뿐이다.
어쨌든 이번 판결을 통해 ‘존 로버츠의 대법원’은 7년 전 약속했던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바마의 정계은퇴 후에도 상당 기간 ‘로버츠의 대법원’은 계속될 것이니 국민의 신뢰와 대법원의 독립성을 지키려는 로버츠가 이념양극화에 휘둘려 극단적으로 치닫는 일은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로버츠가 진보와 악수하는 초당적 대법원이 다음 회기에도 계속될지는 미지수다. 재선된다면 오바마는 대법원과 더욱 갈등 빚는 4년을 각오해야 할지도 모른다. 어퍼머티브 액션, 동성결혼 등의 케이스가 올라온다면 아마도 로버츠는 보다 확실한 보수로 회귀할 것이다.
로버츠는 판결문을 통해 “대법원은 헌법에 의해 연방정부의 권한 제한을 시행하는 의무를 지고있다. 헬스케어개혁법이 바람직한가에 대한 의견을 표하지는 않는다. 그 판단은 국민들에게 주어졌다”면서 헬스케어나 이민법, 어퍼머티브액션의 미래가 유권자들의 결정에 달렸음을 암시했다.
은퇴가 멀지않은 70대 대법관이 4명이나 포진한 대법원의 이념지형 변화 역시 11월, 우리의 한표 행사에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추신 : 고도의 정치전략이든, 수십년 후를 겨냥한 장기포석이든, 초당적 표결로 헬스케어개혁법을 사지에서 구출해낸 로버츠 대법원장에게 ‘전국민 의료보험’을 적극 지지하는 나도 처음으로 감사를 전하고 싶다 - “아무도 방해 못할 섬나라 몰타에서 멋진 여름휴가를 즐기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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