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적인 폭스뉴스를 제외하곤 좀처럼 선데이 토크쇼에 응하지 않던 미트 롬니 공화당 대선 후보가 지난 일요일 CBS의 ‘페이스 더 네이션’에 출연했다. 당연히 이틀 전 오바마 대통령이 전격 발표한 불법체류 청소년 구제조치가 떠올랐다.
“만약 당선되면 오바마의 조치를 폐기할 겁니까?” 사회자 밥 쉬퍼가 물었다.
“음, 한 걸음 물러서서 이슈를 살펴봅시다…” 롬니는 대답을 피해갔다. 공화당 경선 내내 드림법안을 단호하게 반대하고, 불체자의 일상을 비참하게 만들어 제 발로 나가게 하는 ‘자진 추방’을 역설하며 초강경 반이민 입장을 과시하던 롬니는 거기에 없었다.
지난 주말 이민사회 곳곳에 환희의 물결을 일게 한 오바마 대통령의 발표내용은 우리가 오랫동안 기다려온 드림법안도, 포괄적 이민개혁안도 아니다. 오바마 자신의 말처럼 “영구적인 해결책이 아닌” 잠정적 조치일 뿐이다.
내용자체는 드림법안에서 약간 모자란다. 16세 이전 어렸을 때 부모 따라 입국해 최소 5년 이상 미국에 거주한 30세 이하의 젊은 불법체류자들을 대상으로 한다. 고교를 졸업하거나 군복무를 마쳐야 하며 범죄기록도 없어야 한다. 시민권은 신청할 수 없지만 노동허가서는 받을 수 있다. 그늘 속에서 절망하던 약 80만명 젊은이들의 체류와 취업을 허용하는 획기적인 정책이지만 형식은 이들에 대한 추방을 임시 중단한다는 국토안보부의 내부지침 행정명령이다.
이번처럼 깜짝 시행될 수도 있지만 어느 한 순간 전격 폐지되거나 변경될 수도 있는 게 행정명령이다. 백악관의 주인이 바뀔 경우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당선되면 폐기시킬 것인가”는 당연히 물어야 하고 반드시 대답해야 할 질문이다. CBS의 쉬퍼도 4번이나 물었지만 롬니는 끝내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 없었다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지 모른다.
15일 오바마의 전격발표 후 공화당 지도부의 반응은 의외로 소극적이었다. 공화당 일반 의원들과 극우보수진영에선 예상대로 “사면”이라는 비난과 함께 소송 위협, 봉쇄법안 발의 등이 잇달았지만 지도부는 조용~했다.
쏟아지는 미디어 질문에도 애매하게 답변한다. 존 베이너 하원의장은 “의회에서의 초당적 해결책 합의가 힘들어졌다”고 지적한다.(어? 공화당이 이민개혁안을 초당적으로 처리하려고 했단 말인가) 미치 맥코넬 공화당 원내대표는 “롬니의 방침에 따르겠다”만 되풀이 한다,(굳세게 입을 다물어 온 롬니도 아마 오늘은 대답을 해야 할 것이다. 전국라티노공직자협회 연례모임에서 스피치 할 예정이니까) 존 매케인은 “마르코 루비오의 드림법안을 포용할 준비가 되어있다”고 선언했지만 몇 달 전부터 공화당판 드림법안을 추진해온 루비오 상원의원은 엊그제 자신의 법안을 “유보 하겠다”고 밝혔다(행정부에 선수를 빼앗겨 김이 샜기 때문일까)…
대선을 겨냥한 오바마의 이민정책 승부수는 일단 성공적이다.
무엇보다 번번이 밀려온 이민개혁 처리에 지치고 분노하면서 시들해진 히스패닉 등 이민자 표밭의 지지를 되살리는 계기가 될 것이다. 구제조치 자체에 대한 여론의 반응도 좋다. 특히 선거의 결과를 좌우할 무소속 응답자의 지지가 66%나 된다.
그리고, ·롬니와 공화당을 난처한 입장에 빠지게 한 것이다! 오바마의 조치를 지지하면 롬니는 ‘말바꾸기’의 비판을 또 한 번 감수하는 동시에 아직 장악하지 못한 극우핵심 표밭의 분노에도 직면해야 한다. 그러나 치열한 경합주에서 결정적 역할을 할 히스패닉 표밭의 지지율을 높이지 못하면 대선 승리는 물 건너 갈 것이라고 정치 분석가들은 경고한다.
오바마의 전격조치의 주요 동기가 “정치적”이라는 롬니의 말은 맞을 것이다. 백악관은 펄쩍 부인하지만 루비오의 드림법안 추진으로 이민이슈를 공화당에 넘겨줄까 두려워 오바마팀이 발 빠르게 움직였다는 미디어의 분석들도 설득력 있게 들린다.
때론 노골적인 정치전략이 바람직한 정책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USA투데이의 지적처럼 상식과 휴머니티, 미국의 국익을 반영하는 이번 조치가 바로 그렇다. 미국에서 자라고 미국에서 교육받아 영어가 모국어인 미국아이들, 고교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온 성실한 젊은 인재들, 이들에게 살 길을 열어주지 않는 것은 ‘이민의 나라’ 미국의 건국정신에도, 국가의 이익에도 위배되는 일이다.
오바마 발표는 물론 ‘추방 중단’이라는 임시 조치일 뿐이다. 드림법안과 포괄적 이민개혁안의 의회통과라는 궁극적 목표를 향해 겨우 내딛은 첫걸음에 불과하다. 아직 갈 길이 멀다. 몇 달 후 백악관의 주인이 바뀌면서 추방령이 되살아날까 겁나는 두려움도 남아있다.
그러나 지금 당장은 잠깐 차오르는 기쁨의 순간을 누려도 좋을 것이다. 절망과 공포의 그늘에서 숨죽이던 우리 아이들, 그리고 아이들보다 더 속이 타들어가던 부모들의 얼굴에 희망과 안도의 밝은 내일이 피어나고 있다. 완강히 닫혔던 문이 열리기 시작한 것이다. 대학생 두 자녀가 받게 된 이 ‘놀라운 선물’에 가슴벅차다는 한 이민어머니는 “땡큐, 오바마”라는 대형 배너를 모든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프리웨이 입구에 내걸고 싶다고 했다.
정치적 포석임을 알고 있지만 지금은 나도 “땡큐, 오바마”라고 외치고 싶다. 시민권자나 영주권자인 독자 여러분의 마음도 같을 것이라고 믿는다.
<박록 주필>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