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 고향 통영 항구를 향해 가고 있었다. 디스코 수술 후, 수술의와 나의 주치의의 ‘절대로 넘어져서는 안된다’는 경고성 주의를 머리 속에 담고서 걸어가고 있었다. 마치 한샘병 환자이자 시인인 한하운이 모지라진 발꾸락의 발을 감싼, 치카다비(일본인 노동자들이 신는 신발)를 질질 끌고서 보릿밭 이랑길을 지나, 소록도로 향해 걸어 갔듯이 걸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일본의 99살 여류시인인, 시바다 도요 할머니의 ‘약해지지마’의 시 구절--- / 있잖아, 불행하다고 / 한숨 짓지마 / 햇살과 산들바람은 / 한쪽 편만 들지 않아 / 꿈은 평등하게 꿀 수 있는 거야 / 나도 괴로운일 / 많았지만 / 살아 있어 좋았어 / 너도 약해 지지마 / 를 몇 번이고 몇 번이고 되뇌이며 걸어가고 있었다.
그렇다! 한하운이 걸어갔던 그 길은, 다시는 육지로 되돌아 올 수 없는 길이었지만, 내가 지금 가고 있는 길은, 보람이란 어떤 선물을 보자기에 가득 싸 가지고 올지 모른다는, 희망의 길이었기에 말이다.
한국에서의 열 나흘의 머무름은, 전에 비해 너무도 짧게만 느껴졌다. 하지만 짹각 짹각 시각(時刻)이란 계단을 밟고 넘어가는 초침 소리는, 내 인생 해그름의 멋진 전환을 알리는 소리 같이 들려 오기만 했다.
서울에서 체류 7일 동안, 전과는 달리 단지 나의 연극 동지 3명만 만났다. 그 까닭은 나의 쩔뚝거리는 꼴사나운 모습을 많은 문학 동지들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서 였다. 이어 나는 마누라와 함께 N군의 안내로, 충주 변두리에 있는 수안보 온천으로 발길을 옮겼다. 그건 지난 해에 겪었던 여러가지 불행으로 인해 쌓이고 쌓인 마누라와 나의 심신의 피로를 온천물에 담궈 풀어보기 위해서 였다.
따뜻한 탕 속에서 나는 지긋이 눈을 감았다. 그러자 지금으로부터 오랜 세월 전인, 그러니까 내 나이 30대 후반일 때, 내가 회장으로 있던 한국아동극협회 충북 지부장의 초청으로 여기에 와서, 오늘 같이 이렇게 탕 속에 몸을 담구었던 그 때 생각이 옛적 반딧불의 추억처럼 깜박이고 지나갔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과 몸뚱아리를 쓸어 보았다. 그 시절 매끈한 가죽 같이 보드러웠던 내 살갗이, 까칠한 수세미 같이 변해 있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면서, 세월의 흐름 앞에 그저 나지막하게 한숨 지울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수안보에서의 사흘 간의 휴식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 왔다. 서울로 되돌아 온 그 다음 날로, 부산행 철마(KTX)에 몸을 실었다. 그리고는 택시로 갈아 타고, 우리나라의 순수기술로 건설된, 거가(巨加) 터널을 타고, 내 고향으로 향해 달려갔다.
해저 40미터, 길이4.4 Km의 세계에 자랑할 만 한 이터널을 달려가면서, 내 머리 속에 두 가지 생각이 떠 올랐다. 그건 내가 1963년도에 우리 나라 최초로 창단된, 아동극단 ‘새들’ 단원과 학부모들을 인솔하여 제1차 일본 순회공연을 갔을 때, 교포가 모는 자동차에 실려, 칸몬터널(일본의 최남단 도시인 시모노새끼시와 큐슈의 북단 도시인 모지시를 잇는, 해저터널)을 달리면서 느꼈던, 그 때의 감동은 지금 거가터널을 달리면서 느끼는 감동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니라는 바로 그 생각인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편의 생각은, 내가 이민 가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와 인근 도시인 오클랜드를 잇는 베이브릿지가, 출퇴근 시간마다, 극심한 교통 체증을 앓고 있는데도 선진국이란 미국이 지금껏, 두 도시를 잇는 해저터널을 왜 뚫지 못하는 걸까? 하는 의문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면서도 내 나름대로 추측을 해 본다. 아마도 바다 물살이 너무도 급류(急流)이기 때문에 그럴 것이라고 말이다.
나를 태운 택시는 2시간을 달려, 통영시장과 만나기로 한 약속시간인 3시 10분 전에, 나를 시청 현관 앞에 내려 놓았다. 나의 연세대 후배이기도 한, 김동진 시장과 나는 시장실에서 마주 앉았다. 그리하여 내가 이번에 한국 나들이를 하게 된 주된 목적인 나의 기념관 건립문제에 대한 논의가 시작되었다.
그런데 김 시장이 나에게 들려준 말은 ‘주 평 선배님의 기념관 건립은 우리 시에서도 계획하고 있지만, 우리 시의 조례상 통영을 빛낸 다른 문화ㆍ예술인들처럼 선생님의 사후에야 이루어질 것입니다’ 였다. 나는 사후에서나마 나의 기념관 건립을 내 고향 통영시가 계획하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감사하면서, 내 입에서 흘러 나온 농담 섞인 말이,‘내가 내 생전에 내 기념관 건립을 보지 못할 망정, 나는 빨리 죽고 싶지 않소!’ 였다.
나의 이 뜻밖의 농담에 김 시장은 물론, 그 자리에 배석했던 한산신문의 허도명 사장과 나와 동행했던 N군들의 입에서 폭소가 터져 나왔다.
시장실을 나온 나는, 허 사장의 차에 실려, 통영의 문화ㆍ예술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갈 4ㆍ50대 내 후배들의 모임인 ‘예술의 향기’가 주최하는 나의 특별 강연장으로 향하여, 이제는 나 에게 낯선 땅의 길 같이 느껴지는 길을 달려가고 있었다. (다음 주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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