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가 중요한 학생 시절 어른들로부터 많이 들었던 말이다.“공부해서 남 주냐!” 이 말은 공부 열심히 잘하면 결국 너 좋은 일인데 왜 그걸 모르고 그토록 공부 안 하느냐는 부모들의 답답함이 섞인 말이었을 것이다. 아이러니는, 이 말이 그땐 그토록 듣기 싫은 말이었는데 공부 안 하는 자녀들에게 지금 하고 있는 우리의 말이 되었다는 점이다. 사람은 매사에 뒷북 치는 데 익숙한 존재임이 이런 데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 때늦은 후회 때문이었을까. 나도 공부하랄 때 잘 안 하다가 늦바람 공부에 빠지게 되었다. 남들은 다 사회로 진출해 일하기 시작하는 늦은 나이에 목사 된답시고 신학교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미 시작한 공부 더 하고 싶다며 미국유학의 문까지 두드렸다. 하지만 중간에 목사가 되어 목회의 길로 접어들면서 공부는 중단됐다. 그러다가 7년 전 목회 도중 다시 시작했다. 그게 바로 목회학 박사(Doctor of Ministry) 공부다.
이 코스는 인텐시브(intensive) 과정이다. 1년에 두 차례, 여름과 겨울 각 한 주 동안 학교로 간다. 하루에 8시간씩 강의도 듣고 준비한 발표도 하고, 또 발표 내용을 놓고 학생들(다 목회자들)끼리 토론도 한다.
학교 가기 전 몇 달 동안 미리 내준 약 2000에서 3000페이지의 분량의 책을 읽고 요구된 숙제들을 해가야 한다. 그리고 코스를 다 마친 후에는 더 큰 과제를 내준다.
이삼십 페이지 분량의 소논문을 정해진 기간 안에 써서 제출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거기에 대한 성적이 매겨진다. 그래봐야 그게 고작 3학점이지만. 그런 식으로 하는 과목이 총 8개니(24학점) 최소한 여덟 번은 학교 있는 데까지 비행기 타고 물리적으로 가야 한다. 그리고 나머지 6학점은 논문 쓰기로 충당한다. 그래서 그대로 따라 가면 짧아야 6년 정도 걸린다.
그런데 이제 그 모든 과정이 끝나 지난 5월 18일에 드디어 학위를 받게 되었다. 늦깎이로 시작한 공부의 열매가 맺힌 것이다. 학위의 정점은 사실 논문이다. 그래서 거기서 잘 막힌다.
그러나 지난 4월 9일, 마지막 ‘논문 구술 방어(oral defense)’를 해냄으로써 교수로부터 정식 ‘통과’ 통보를 받았다. 정말 날듯이 기뻤다. 그리고 이 공부가 가능하도록 옆에서 도와준 분들, 아내와 두 자녀들, 기도해주신 부모님들, 특히 재정적으로 후원해주고 환경을 만들어준 두 교회, 전 사역 교회인 콘트라코스타장로교회와 현 사역 교회인 수도장로교회, 모두 다 정말 감사해야 할 대상들이다. 그래서 논문의 서문에서도 이 모든 분들에 대해 감사의 언급을 했다.
무엇보다도 힘들었던 것은 이민자의 영원한 숙제인 언어 문제였다. 그 모든 과정을 친숙한 모국어인 한국어가 아닌, 여전히 멀게만 느껴지는 영어로 해야 했으니 얼마나 힘들었는지 모른다.
어떤 코스웍에는 나 혼자만 달랑 동양인이었다. 나 외에는 완벽한 미국인들이었다. 그것도 보수적인 남부 액센트의 주인공들이다. 그 틈에서 같이 발표하고 토론하는 일을 해내야 했으니 참으로 등에 땀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서 어쨌든, 여기까지 온 게 신기할 따름이며 그래서도 더 감사하고 싶다.
이렇게 장황하게 ‘학위’ 이야기를 하는 것은 자랑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글 초두에서 언급했던 “공부해서 남 주냐” 이야기를 하고 싶어서다. 나이 오십 넘어서까지 한 공부인데, 그렇다면 지금까지의 공부는 사실 나를 위한 공부였던 게 분명하다. 나에게 뭔가를 ‘주기’ 위한 공부였던 것 같다.
그러나 이제 박사까지 되었으면 그 공부한 내용을 남에게 줘야 하지 않나 싶다. 이런 자성적인 질문들과 함께 말이다. 뭐 하러 지금까지 그토록 공부라는 끈에 나의 목을 매고 살았던가? 뭘 위해 지금까지 그 많은 에너지와 재정을 공부에다 투자했던고?
이젠 그 질문에 답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공부해서 남 주냐? 그렇다. 공부했으니 남 줘야 한다. 남 주기 위한 공부가 아니면 그 공부 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한국에도 수많은 박사가 있다. 하지만 그 내로라는 자들 중 어떤 이는 공부한 그것을 사회에 잘 환원하기도 하고, 반면 어떤 이는 공부한 그것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 지혜롭게(?) 활용하기도 할 것이다.
아무튼 나는 전자이고 싶다. 그간의 나의 공부가 이제부터 남에게 ‘주는’ 공부였으면 해서다. 물론 걱정은 되지만 말이다. 바로 이런 걱정이다. 목회학 박사면 ‘목회’에서는 달인이 되어야 할 텐데, 글쎄, 과연 그렇게 될 수 있을까, 하는 걱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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