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엔본부에 자리한 대형 의자
삼면 끝간데 없는 레만호수 프랑스와 스위스 오가는 유람선 흘러가고
호수 절경 속에 떠있는 대표적 고성 ‘시옹성’ 바이런 등 문호.화가들 즐겨찾아
동화마을 연상 시키는 ‘샤모니’는 크리스마스 카드소 보았던 마을 그대호
드디어 제네바 역에 도착했다. 접한 지역에 따라 프랑스어, 이태리어, 독일어 등 4가지 언어가 통용된다는 곳. 론느강과 아르브강에 둘러싸인 구시가지와, 국제기구가 많은 신시가지로 나뉘어 있다는 제네바다.
처음 당도한 곳이 레만 호수 바로 앞의 꽃시계다. 무척 예쁘긴 하지만 1% 부족이다. 특성 있는 꽃을 기대한 거와 달리 베고니아, 팬지 등 어디서나 봐오던 흔한 꽃이니까. 스위스의 토속 꽃이나 나라꽃으로 지역성을 살렸다면 이색적일 텐데 아쉽다. 우리나라도 꽃시계를 만든다면 신토불이로 무슨 꽃이 좋을까? 언뜻 머리를 스친 생각인데, 마땅한 꽃이 퍼뜩 안 떠오른다.
우리 국민이 즐겨 심는 봉선화 과꽃 채송화 분꽃 코스모스 등 대개의 일년초들이 범세계적추세가 된지 오래다. 지구촌 사람들이 선호하는 어지간한 꽃들은 이미 ‘세계는 하나로’ 국제적인 통일을 이뤘다는 얘기다. 그런데 정작 만물의 영장이란 인간들은? 복합적이고 이기적인 잇속과 계산, 종교의 첨예한 갈등에 함몰돼, 전 세계가 일시에 평화를 이룬 적이 없다. 인간이 식물보다 하나도 나을 게 없는 증거다. ‘연탄재 함부로 발로 차지 말라’는 안도현님 시 구절마냥, 식물들을 발로 밟거나 하찮게 여겨선 절대 안 되는 이유다.
레만 호수의 물이 어찌나 맑은지, 오리들의 분주한 발짓까지 생생히 드러난다. 초승달형상이라는 드넓은 호수전체를 조망하는데, 삼면이 다 끝 간 데 없는 수평선이다. 프랑스와 스위스를 운행한다는 유람선들이 멋지게 흘러가고, 요트들은 종이배처럼 떠있고, 하얀 등대도 있으니 꼭 바다다. 호수인 걸 아는데도 일순간 바다란 착각에 빠진다. 일행 중 샌디에고에서 오신 분이 말했다. “스위스는 한국의 충청도인데 아무리 바다 같아도 바다일 수가 없는 거죠. 허지만 수심은 바다만큼 깊대요. 몇 해 전, 친구 아들이 보트에서 실족했는데 끝내 시체를 못 찾았지요.” 호수의 길이가 72km로 서유럽에선 최대요, 중유럽에선 2순위로 큰 호수라니 수긍이 가지만, 참으로 안타깝고 슬픈 사연이다.
프랑스와의 국경 쪽에 제또 분수
가 높이 140m에 이른다는 하얀 물줄기를 호수 속에서 기운차게 내뿜고 있다. 무척이나 하늘가에 닿고 싶은가보다. 내 속이 다 뻥 뚫리듯 시원해진다. 여름과 국제적인 행사 때만 작동이라는데, 10월말인데도 거창하게 우리를 환영해주니 행운의 징조임에 틀림없다.
그다음 간 곳이 최초의 유엔본부다. 주변의 숲과 어울리게끔 아늑하게 들어앉은 하얀 건물이 뉴욕 유엔건물보다 운치가있다. 앞의 공터에 어마어마하게 큰 의자가 설치돼 있는데 다리가 하나 부러졌다. 부서진 건가? 현대 설치미술인가? 하다가 땅에 새겨놓은 동판을 보고 알았다. 노벨평화상을 탄 환경단체가, 발목지뢰를 묻지 말자는 ‘무 지뢰 설치운동’의 취지하에 ‘경각심고취목적상’세워놓은 의자였다. 마음으로나마 적극 동참이다.
레만호숫가에 5,6층짜리 현대식 빌딩 군이 있는데, 2,3층은 명품상가고 위층은 호텔이란다. 우리가 간 중국식당이 그 옆에 있는데, 예정시간에 늦었는지 식사 중에 중국관광객부대가 파도처럼 들이닥쳤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고, 우리가 갖다 달래도 콧등으로만 듣던 뜨거운 녹차를 그들에겐 앉자마자 내놓았다. ‘그래, 반대로 한국식당에서 중국인들과 마주치면 우리 어깨가 펴지게 마련이니까’ 묵묵히 얼른 자리를 피해줬다.
밤에 도착한 호텔이 다시 프랑스 땅이라니 해후한 기분이다. 검문도 비무장지대도 없이 전라도에서 경상도 가듯 무사통과인 자유로움이 너무 사무치고 부럽다. 조국의 비극적 현실이, 애끓음이, 화살처럼 가슴에 와 꽂힌다. 호텔이 아담한데 저쪽 골목 끝에 불을 밝힌 구멍가게가 있다. 밤 나들이는 금기사항이라, 우리 5명은 가이드님을 보디가드 삼아 구멍가게까지 진출했다. 친구들끼리 의지하면서 이국에서 맛본 첫 산보 길은, 사들고 나온 과일 향내 마냥 싱그럽다. 산간지역이라 공기도 청량하고 까만 하늘엔 주먹 같은 왕별들이 그득하다. 문득, ‘저 하늘에 별이 없다면? 내 인생에 오늘 같은 여행이 없다면? 아! 그럼 여행은 별? 그래도 묵묵히 별을 받쳐주는 까만 밤하늘이 있었기에 더 값지겠지.’
안도현님의 <연어>를 떠올린다. 살아가면서 가장 아름다운 일은/누군가의 배경이 되어주는 일이다//별을 더욱 빛나게 하는/까만 하늘처럼/꽃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무딘 땅처럼//함께하기에 더욱 아름다운/연어떼 처럼.
호텔방 샤워실 문이 반만 있다. 고장방치려니 했더니, 문 여닫는 문턱조차 없는 애초부터 반쪽짜리 문이다. 샤워할 때 물줄기를 필요이상 강하게 틀지 않게 유도하는 ‘물 낭비 방지’ 조치였다. 세계에서 가장 귀한 자원인 ‘물 절약 작전’으론 안성맞춤형이라 불만이 없다.
아침에 아담하고 깔끔한 제네바 중심가를 지나는데, 한국에선 자취를 감춘 지 오래인 초록색 전차가 반갑기 한량없다. 돌출간판도 없고 입간판도 겸손할 만큼 작고 얌전해 부담을 안준다. 무 개념으로 난립해 위압감을 주는 한국간판의 실체들과 비견돼 더 달리 보인다.
버스는 높은 재를 두 번이나 넘으며 알프스의 샤모니를 찾아간다. 1시간 30분을 달리는 내내 레만호수는 헤어지기 섭섭하다는 듯 계속 따라온다. 얼마나 큰 호수인지 잘 알겠다. 호숫가의 집들도 하나같이 다 예쁜 별장이다. 챨리 채플린과 오드리 햅번이 와서 말년을 보냈다는 곳은 어디쯤일까? 호숫가에 그야말로 동화속의 예쁜 성이 나타났는데 전혀 낯설지가 않다. 버스가 S자를 그리며 가는데 어느 지점에선가는 성이 완전 호수에 떠있다. 그제야 분명히 인식했다. 오래전부터 몽매에도 잊지 못하던 바로 그 성인 것을.
그러니까 80년대 초, 호주에 살면서 워터칼라를 배울 적이다. 워터칼라 책에서 공주가 색색 잠들어 있을법한 호숫가의 성 그림이 너무 예뻐 두 장이나 모사했다. 한 장은 떠나올 때 친구에게 고별선물하고, 한 장은 지금도 내 방에 걸려있다. 잘못 아는 것은 모르는 것 보다 못 한데, 지금껏 그 성이 독일이나 오스트리아 어느 귀족의 성이려니 여겼다. 실제로 보게 될 기회는 절대로 전무할 줄 알았다. 그랬던 그 성이 관광코스로 느닷없이 내 앞에 나타날 줄은, 직접 보고 사진까지 찍게 될 줄은, 정말 상상도 못했다. 오늘 원풀이를 한 가지 이뤘다. 간절히 마음에 담아두면 어느 날 기적이 이루어진다지만, 너무 신기하다.
내게 그런 사연이 있는 스위스의 대표고성 이름은 시옹성이다. 시옹주교들이 관리했던 성으로 나중엔 감옥으로도 사용됐단다. 이런 절경 속에 갇혀있는 것도 징역살이에 해당되나? 의문이다. 하여간 건축의 외양과 풍광이 원체 빼어나 한때는 루소, 위고, 뒤마, 바이런 등 명성이 자자한 문호들과 화가들이 즐겨 찾았단다. 바이런은 유명한 시 ‘시옹성의 죄수’도 지었다.
아르브강 양쪽에 형성된 산악휴양지이자 알프스등반의 출발점이고, 1회 동계올림픽개최지였던 샤모니가 가까워지나 보다. 고봉준령들이 병풍을 친 곳을 향해 버스는 헉헉거리며 올라간다. 7개국에 걸쳐있는 알프스산맥의 산과 줄기들이 짐작보다 하얀 부분이 터무니없이 적다. 지구온난화여파일 테니 마음이 무겁다. 산에서 떨어진 거대한 빙하에 패여 홈통모양인 샤모니 계곡의 풍부한 개울물도 빙하 녹은 물이다 싶으니 걱정스럽다. 산은 이제 막 노랗게 물드는 자작나무들과 초록빛 히말라야시다가 주종으로 아름답지만.
산장 같은 식당에 도착하니 주인이 40대 중반의 한국남자다. 멀고도 깊은 산속에서 동포를 만나니 반갑다. 어찌해서 이 먼 곳에 사시게 됐냐니까, 산이 좋아 산을 타러왔다가 주저앉게 됐다는 산 아저씨였다. 여긴 프랑스고 불어권이라 그런지 한국 사람은 불과 4명밖에 안된단다. 프랑스 버건디 지방에서 유래한 스위스 전통식인 퐁뒤 요리가 꽤나 괜찮다. 얇게 저민 쇠고기를 쇠 꼬치에 꿰어 즉석에서 끓는 기름에 넣었다가 소스에 찍어먹는데 전연 느끼하지 않고 담백하다. 너무 연하고 부드러워 혹시 알프스에서 키운 소? 생각했을 정도다. “이런 아름다운 곳에 사시니 참 좋으시겠어요?” 순간적인 부러움에 물었다. “천당도 맴이 편해야 천당이죠. 지옥도 맴이 편하면 좋은 거구요.” 촌철살인으로 돌아온 산 아저씨 대답이 인생철학이다. 내 질문의 철없음이 와락 미안하고 부끄럽다.
식당 앞의 작은 화단에 핀 장미 비슷한 꽃이 너무 소담스럽고 화려하다. 알프스의 야생화인줄 알고 잎을 보니 달리아다. 꽃송이가 하도 크고 색깔이 강렬해 장미보다 한 수 위다. ‘달리아의 재발견’이다. 예전에 할머니도 봄이면 겨우내 쌀광에 보관하던 달리아구근을 심으셨다. 나도 내년엔 기필코 달리아를 심어야지.
샤모니는 진짜 어릴 적 크리스마스카드에서 보았던 마을의 실물이다. 드디어 동화마을에 어울리는 빨강. 하얀 색의 케이블카에 당도했다. 예상외로 커서 우리 일행을 포함 60명 정도가 탔다. 50년 전에 지지대도 없이 로프로만 설치된 거론 세계최장이라는데 적당히 긴장감을 주며 출렁거린다. 초등학교시절 ‘알프스의 소녀’를 읽을 때부터 머릿속에 그려온 산간지대를 내려다본다. 온통 빙하와 눈에만 덮여 있는 줄 알았더니 흙색의 산등성이부분이 아주 많다. 어찌나 높이 올라가는지 분지에 폭 싸인 샤모니의 집들이 비행기에서 내려다볼 때만큼 작다. 백설 공주와 일곱 난쟁이들이 사는 마을로 보인다.
케이블카를 내려 조금 걷자, 빙하가 덮여있는 산을 뚫은 터널이다. 터널을 나와서도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구름다리와 마주했다. 비교적 넓은 콘크리트다리라 그런지 스릴감은 들지만 현기증 없이 건널만하다. 대피소 같은 건물 안에서 계단을 오르니 툭 터진 해발 2525m인 브레방(몽땅베르)전망대다. 눈 맞는 삽살개모양 얼마나 흥분했는지 케이블카 일행 중 내가 일착이다. 병풍처럼 에워싼 설산을 둘러보는데 애석하게도 바로 건너편의 몽블랑의 얼굴만 안개 옷으로 가렸다. 예전엔 마의 산이었고, 몽블랑만년필로고마냥 ‘하얀 산’이란 뜻의 몽블랑자태를 눈앞에 두고도 끝내 못 보니, 오늘의 내 운명이다.
왼쪽 건너편에 조금 더 키가 큰 정상엔 로케트나 우주발사선 비슷한 게 있다. 승강기를 타고 오른다는 3842m ‘에귀디 미디’ 전망대다. 직접 가지 못해 유감이지만 설령 가본다 해도 몽블랑은 어차피 ‘면접불가’니 위로가 됐다. 2순위로 도착한 김가이드님과 ‘안개 낀 몽블랑’을 배경으로 인증 샷을 교환하고는 친구들을 기다렸다.
유와 이, 고소공포증이 있어 걱정했던 성까지 왔는데 제일 연약한 박이 영 안 나타난다. 아무래도 기운이 딸려 뒤처지다 어디서 주저앉았나보다. 와락 근심이 돼 후다닥 계단을 뛰어가는데 약간 어지럽다. 그래도 급한 마음에 박의 이름을 부르며 구름다리까지 막 뛰었다. 터널 안에 당도해서야 휘적휘적 오는 박을 만났다. 일행들이 하나도 안 보여 걱정하면서 천천히 걷는 중이란다. 내가 부쩍 울렁증이 심해지고 어지러워 손이 떨리며 다리까지 비틀거려 털썩 주저앉았다. 그제야 ‘어쿠! 고산증이구나’ 했다. 조금이라도 고도 낮은 데로 가는 게 급선무다 싶어, 모임 지정장소보다 아래인 케이블카시승장까지 겨우겨우 갔다. 계단에 주저앉아 심호흡을 계속하니 좀 나아졌다. 고산증세예방수칙에 뛰는 건 절대금물인데, 숙지하지 않고 뛰는 무리수를 둔 내 불찰이었다. 아무런 대가없이 다 주지만, 결코 만만히 보고 함부로 범접하지 말라는 ‘산의 가르침’을, 따끔한 비용을 치르고서야 터득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영원에서 지상으로‘오니 고산증상이 천만다행 연기처럼 사라졌다.
버스를 타고 이태리를 향해 출발이다. 산자락에 다락 논처럼 층층이 심어진 포도나무들도 고산증인지 키들이 난쟁이다. 가족운영포도원인지 전부 소규모다. 얼마 안 가서 8년이나 걸려 완공된 몽믈랑 터널로 들어섰다. 장장 11,6Km인 터널은 샤모니에서 몽블랑 산 밑을 관통해 이태리의 꾸르마이에 이른다. 터널이 프랑스와 이태리의 국경선이라 양쪽나라 공동관리다. 가도 가도 굴속인데 97년에 대화재가 발생했을 적엔 얼마나 아비규환이었을까. 그 후 잠정적으로 폐쇄됐다가, 알프스산맥을 지나는 주요통로라 재개통됐단다.
굴을 벗어나니, 우리나라의 각 도와 시의 경계점에 ‘어디입니다’ 써있는 표지석 마냥 ‘이태리’란 사인이 있다. 인제 우린 완전히 프랑스와는 두 번 작별이고 이태리로 들어섰다. 스위스와는 작별인사도 없이 건너 뛴 게 돼버렸다. 다음을 기약하는 징조로 받아들이기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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