낯선 이메일이 왔다. 그냥 지우려다가 어떤 예감에 끌려 창을 열었다. 꽤 긴 영문 메일이다. “저는 제이미라고 합니다. 혹시 선생님께선 30년 전, 와이오밍 쉐리단(Sheridan)이란 소도시에 산 적이 있으신지요? 제 아버지 성함이 ‘인’씨이고 저는 26살 된 딸이랍니다.”
그래, 옛날 일이다. 내 첫 직장이 와이오밍 환경청이었다. 입사 3년 후, 엔지니어링 매니저로 주 북동쪽, 쉐리단이란 소도시로 전근을 갔었다. 당시 전 세계는 중동사태로 에너지 파동이 나고, 엑손, 텍사코 같은 굴지의 회사들이 와이오밍의 원유와 석탄 개발을 위해 몰려왔었다. 유전과 노천광들이 급속도로 개발되면서 하천과 지하수 오염문제가 심각하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공해 전문 인력이 부족한 상황에서 내게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셈이다.
남한의 2.5배나 되는 와이오밍은 대부분 황량한 황야의 박토이다. 그러나 지하엔 무진장한 석유와 석탄, 그리고 우라늄 등의 자원들이 매장되어 있었다. 광산 지역에서 멀지않은 곳에 인구 3만 남짓, 쉐리단은 빅혼 산맥을 끼고 경관이 수려한 산촌이었다. 그곳으로 옮겨갔던 이듬해, 한국에서 젊은 부부가 갓 이민 왔다. 친척의 연으로 결국 이 산촌까지 들어왔는데 나와 연배가 비슷했다. 인씨 부부였다.
제이미는 이메일에 옛 이야기를 계속 써나갔다. “저희 부모님들은 아직도 쉐리단에 사십니다. 그런데 옛날 얘기만 하면 꼭 선생님가족들을 회상하면서 눈물을 흘리십니다. 당신들이 처음 정착할 때 도와주신 은인이라고 하셨습니다. 선생님 가족이 캘리포니아로 떠나신 후, 연락처를 몰라 애태우다가 얼마 전, 저희 아버지가 선생님이 쓰신 칼럼을 한국일보에서 보셨답니다. 그래서 연락처를 수소문해 우선 이메일을 드립니다.”
세상에 드라마 같은 해후가 있다면 이런 건지도 모른다. 30년 만의 재회. 그들의 딸, 제이미는 쉐리단에서 태어나, 아이비리그 대학을 졸업하고, 마침 세계적인 컨설팅회사의 서부 책임자로 나와 있었다. 자식농사도 잘 지었다. 나는 곧 제이미에게 답장을 했다. 그녀는 무척 반가워하며 2주 후에 부모님들이 샌프란시스코를 경유, 한국에 나갈 예정이니 그 때 뵙자고 연락이 왔다.
30년 전, 제이미 아빠가 처음 쉐리단에 오던 때, 그는 한국에서 은행 대출 업무를 담당하던 촉망받던 젊은이였다. 그런데 말도 안 통하는 미국 산골에 와서 그는 이민 온 걸 후회막급해 했다. 시간만 나면 우리들에게 힘든 마음을 쏟아놓았다. 그의 아내는 만삭이었다. 그는 급한 김에 쉐리단 하이스쿨의 청소부로 취직하였다.
그는 학교 청소를 하면서 조그만 비디오 가게를 내었다. 단돈 2,000달러를 빌려 연 가게였다. 그런데 그는 사업안목이 있었다. 당시 비디오 사업은 막 뜨기 시작한 유망업종이었다. 그는 VCR과 TV까지 팔았다. 그 무렵, 우리는 쉐리단을 떠나 샌프란시스코로 옮겨왔다.
호텔로비에 들어서면서 우리는 첫눈에 서로를 알아보고 얼싸안았다. 30년 세월이 눈 녹듯 사라졌다. 옛날보다 그의 눈매가 한결 편해보였다. 부인의 착한 미소도 그대로다. 놀랍게도 그는 큰 재력가가 되어있었다. 록키산맥 지역을 중심으로 전자기기 도매, 주류도매 프랜차이즈 사업을 곁들어 대형 쇼핑몰과 부동산 개발 사업을 용의주도하게 벌이고 있었다.
“그동안 정신없이 달려왔습니다. 언젠가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쓴 책에서 ‘당신이 가장 부유할 때 당신의 삶은 가장 빈곤해 보인다’란 글을 보았어요. 비로소 내 삶이 행복한가를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옛 은인을 만나 감사한 마음을 전하는 것도 내 행복을 찾는 훈련의 첫 걸음이겠지요.” “은인이라니.. 나는 편한 옛 친굽니다.” 서로의 주름진 얼굴을 들여다보며 나누는 정담 속에 샌프란시스코의 밤은 훈훈하게 깊어갔다.
김희봉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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