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가 방인숙의 서유럽 여행기 (8)나폴리와 카프리 섬
카프리 전경
폼페이에서 기차를 타고 쏘렌토로 가는 길. 소박하고 오래된 집들마다 뒤뜰에 은행나무나 레몬나무들이 있다. 장대를 세워 놓고 나무위로 검은 장막을 쳐놓았는데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일 년에 레몬을 세 번이나 수확한다는데 저 검은 장막 덕인가?
30분 뒤에 종착역인 항구도시 쏘렌토
다. 우체부가 작곡한 ‘돌아오라 쏘렌토로’란 이태리 가곡으로 알려진 곳. 아래로 바다가 보이는 원경이 아늑하고 아름다운 항구다. 인구 2만 5천의 소도시지만, 예쁜 휴양해변마을을 찾는 관광객들만 연 10만이다. 쏘렌토 기차역에서 기다리던 버스를 타고 부둣가로 갔다. 작은 여객선을 타고, 영국의 다이애나비와 챨스가 신혼여행을 왔던 곳, 로마황제들의 별장이 있던 곳인 안나 카프리 섬으로 간다. 카프리 섬은 이태리 남부 나폴리 현에 딸린 섬으로, 나폴리 만의 초입이자 쏘렌토로 앞바다에 위치하고 있다. 쏘렌토에선 배로 20분이고 나폴리 항에선 45분 거리다. 기후는 온화하고 섬전체가 용암으로 덮여있는 다듬지 않은 원석 같은 섬이다. 아우구스투수 황제가 아스키아란 섬에서 휴양 후 귀환하다 우연히 발견했다는 섬이다.
관광시즌을 비낀 10월 말이라 배는 거의 전세 낸 상태고 날씨까지 끝내줘 최고다. 갑판으로 나가니 얼굴을 스치는 해풍이 한없이 감미롭고 상쾌하다. 멀리 바다를 보며 산벼랑에 들어앉은 집들의 원경이 꿈속에서나 볼 한 폭의 풍경화다. 그런데 구면처럼 친근하다. 배에서 내려 중심지인 비토리오 광장에서 미니합승을 타고 좁디좁은 골목길로 들어섰다. 절벽 길이 어찌나 좁은지 꼬불꼬불 아슬아슬 올라가는데, 기사아저씨의 마술 뺨치는 운전 실력이 달리 보인다. 아래로 멀어지는 푸른 바다와 해변, 산기슭에 새집처럼 붙어있는 지중해식 집들의 풍정이 확실히 눈에 익다. 길이 미니버스조차 거부할 만큼 좁아져서 걸어 올라간다. 예쁜 지중해식 정원을 담 구멍으로 훔쳐보다가, 낯익은 이유가 퍼뜩 깨우쳐졌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영화가 ‘이수’다. 뉴욕행 유람선에서 만나 사랑에 빠진 남녀가, 6개월 후 엠파이어스테이트옥상에서 만나기로 했던 그 명화 말이다. 닉키 훼란테<케리 그란트>와 테리 맥케이<데보라 카>가 유람선이 항구에 정박하자, 방문한 닉키의 자누할머니 집 주변 전경이, 지금 올라오며 보던 근경과 똑같아 구면으로 다가온 것이다. 그 영화를 볼 때마다 아름답고 낭만적인 그곳에 꼭 한 번 가보기를 꿈꿔왔다. 그런데도 너무 의외라 염원하던 그곳에 왔다는 게 도시 믿기지 않는다. 실제 나폴리에서 촬영했다는데, 배가 정박한 장면은 나폴리지만 할머니 집은 카프리였다는 확신이 든다.
드디어 해발 298m인 아나카프리 마을에서, 세지오비아라는 일인용 리프트 승차장에 도착했다. 스키리프트 격인데, 도우미 남자가 타이밍에 맞춰 시승을 도와줘도 타는 순간 좀 겁나긴 했다. 홀로 앉아 살랑살랑 흔들리며 올라가니 나비가 된 기분이다. 뒤돌아보면 끝없이 펼쳐진 파란 바다요, 앞을 보면 파란 하늘 밑에 산이요, 고개를 들면 눈앞에 청청한 푸른 하늘이다. 밑을 보면 구릉 위에서 숨은 듯 수북수북 피어있는 샛노란 민들레와 각양각색의 야생화다. 어느 집엔 조그만 웅덩이 연못도 있고 아기자기한 꽃밭도 있다. 야외사당인지 작은 돌무더기 탑과 작은 마라아상이 있는 집도 보인다. 산의 소나무들은 튼실한 연갈색솔방울이 송송이 달려 처음엔 꽃 인줄 알았다. 주황빛 아카시아 꽃처럼 보여서다.
그렇게 15분가량 끄덕끄덕 천상을 향했더니, 해발 585m인 몬테솔라전망대다. 아스라이 내려다보이는 푸른 바닷가와 산비탈의 해변마을은 선경이다. 물빛이 어찌나 파란지 수평선 없이 그냥 하늘과 닿았다. 형제처럼 나란히 두 개의 작은 섬이 마을을 파수 보는데 얼핏 독도랑 비견된다. 하나는 커다란 구멍이 뚫려 햇빛이 바닷물을 반사해 동굴이 푸른빛으로 가득 찬다는 푸른 동굴과 해식 동굴이다. 푸른빛이 찼는지 안보여 천리안 아니고, 망원경 없는 탓만 한다. 케이블카로 오르는 아래편 대포전망대라면 천연동굴을 가까이 접하련만. 동굴까지 운행하는 배도 있다지. 아쉬움에 마음의 동굴에다 추억만 한껏 채우다.
산정상이 제법 넓고 평평해 매점과 식당, 잘생긴 소나무가 둘러 선 정원도 있다. 말이 매점이지 근사한 야외좌석들을 겸비해 카페분위기의 아이스크림집이다. 이태리에선 거의 아이스크림을 직접 만들어 팔아 맛이 건강하다. 홈 메이드 아이스크림을 들고 소풍 온 애들 인양 그네에 앉아 한담을 나눈다. 오늘은 육, 해, 공을 다 타본 거라며,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며, “호호”거렸다. 우리 5명은 솔 향에 취해 해풍을 마음껏 가슴에 담으며 추억까지 한 컷 찍었다. 파란 하늘만큼 충만감이 차오른다. 내겐 여기가 유토피아다.
다시 리프트를 타고 먼 바다와 먼 하늘에 눈을 주며 스륵스륵 내려온다. 완전 무장 해제된 순간이다. 너무 눈이 호사스러워, 너무 행복에 겨워, 눈물이 나려한다. 아! 언제 또 이런 순간이 오겠나. 영국의 시인 셸리의 A Lament<탄식, 비가>첫 구절과 마지막 구절을 음미하며 나도 모르게 탄성을 내지르게 된다.
O world! O life! O time!//... // But with delight/No more_oh never more! <오 세계여! 인생이여! 시간이여! 기쁨은 이제 오지 않으리. 두 번 다시 오지 않으리!> 미니합승에 앉아 지그재그 내려오는데, 해안가의 경관이 숨을 흑 들이키게 한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유지해야할 거리가 있듯이, 사람과 자연사이도 거리가 있음에 더 아름다울 수 있음을 절감한다. 타고 갈 배가 오는 동안 해변의 모래사장으로 갔다. 용암 탓으로 모래와 자갈들이 까맣다. 예쁘디예쁜 마리나그란데 항구마을엔 기념품가게 식당들이 오밀조밀 들어섰는데, 부담 없고 시골스러워 마음에 든다. 세계의 부호들, 예술가, 작가, 연예인, 귀족들이 왜 카프리섬을 휴양지로 삼는지, 별장을 짓는지, 수긍이 간다.
쏘렌토에서 올 때랑 달리 큰 페리를 탔다. 옛날 그리스의 식민도시였던 네아폴리스가 기원으로, 그리스가 세운 신도시라고도 하는 나폴리. 이태리에서 두 번째 인구밀집 도시고 물가는 가장 싸며, 피자의 본고장이라는 나폴리로 가기 위해서다. 45분 후면 32km 떨어진 나폴리의 싼타루치아 항구다. 나폴리를 보고 죽으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세계 3대 미항 중에 낄 정도로, 아름답다는 나폴리항구! 한참 달리니 멀어지는 카프리와 검붉고 화려하게 노을 진 수평선으로 빨간 해가 바다로 투신일보직전이다. 정녕 놓치기도 눈에만 담기에도 아까운 순간이다. 숨을 정지한 채 사진을 찍으며 헬렌켈러의 말을 상기한다. ‘단 하루라도 볼 수 있다면 석양의 아름다움과 무지개의 영롱함을 보고 싶다’는... 그녀한테 미안하고 얼마나 나 자신이 선택받은 점이 많은 지에 대한 무한한 감사가 밀물처럼 온 몸에 차오른다.
나폴리항구는 과연 크다. 대형 유람선이 여러 척 정박해있고 규모면에선 카프리해안과는 게임이 안 된다. 바다에서 보는 산타루치아 항구는 산비탈에 층층이 앉은 집들의 지중해식경관이 카프리와 비슷하다. 결코 상상이상의 미항은 아니다. 브라질의 리오데자네이로 항구는 못 봐서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눈엔 호주의 시드니항구가 훨씬 빼어나다.
날카로운 해안절벽위에 성 같고 요새 같기도 한 견고해 보이는 건축물이 있다. 난공불락인 산타루치아성<달걀성>인데 12세기엔 감옥이었단다. 산타루치아는 나폴리의수호신인 ‘성녀 루치아’를 의미한다. 그런 연유로 뱃사공이 항구를 떠날 때, 무사귀환과 안전을 기원하며 부른 노래가 ‘산타루치아’다. 우리나라 어촌도 그런 노래가 있으련만, 머리에 안 떠오르니 참!
대기 중인 버스를 타고 나폴리시내를 관통해 로마로 복귀다. 비교적 고전과 현대가 공존하는 인상이랄까. 시내는 집들마다 시트와 빨래들이 주렁주렁 깃발처럼 휘날려, 홍콩이 연상된다. 예쁘고 화려하고 깨끗한 동네와, 쓰레기로 음산한 거리의 낙후된 서민동네는, 심한 양극화와 마피아로 골치 아픈 점이 엿보이는 징후다.
가이드님이 갑자기 세계 네 번째 미항이 어느 곳이냐고 묻는다. 아니 4대 미항까지 있나? 아무리 머리를 쥐어짜도 모르겠다. 정답은 ‘포항’이었다. 4란 발음이 비슷해서 착안된 풍자문제지만, 모두들 신나서 버스가 흔들리게 박수치며 웃었다. 진짜이길 바라는 소망의 공감대가 이심전심 통해서였다. 정말이면 얼마나 좋을까! 속으로 가만히 기원한다.
로마로 가는 길에 산이 움푹 파지고 절단된 곳이 여러 번 눈에 띈다. 온 세계인들이 이태리대리석만을 밝혀서 저 짝 나는 모양이다. 산이 얼마나 아플까!
마지막 만찬 때 후배부군님이 테이블마다 맥주를 돌리셨다. 우리는 내일 뉴욕향발이고 그분들은 피사로 갔다가 모레 귀향이라 석별의 잔이다. 이태리 맥주 맛은 어떤 가 마셔봤더니 약간 단 맛에 목 넘김이 아주 순하다. 이태리는 맥주조차 명품 맛인 걸 몰랐다. 후식으로 또 그냥 통과일이다. 뉴욕처럼 먹기 좋게 껍질 까고 베어져서 나오질 않는다. 사과 한 개씩, 오렌지 한 개씩, 아니면 포도 한 송이 그런 식이다. 유럽 후식문화의 전통인지, 런던, 파리, 스위스, 이태리 어느 한 곳도 그런 서비스를 해준 식당이 없다. 뉴욕식당의 재발견이다.
로마에서 세 번째로 자게 된 호텔이 어느 새 정이 들었다. 떠난다 하니까 섭섭해서 창가로 갔다. 여행지에서 보낸 시간들이 벌써 꿈속에서 만난 세계처럼 아련한 그리움 속에 주마등처럼 스친다. 이번 여행에서 배운 만큼, 딱 그만큼만 자라있을 창유리에 투영된 내 모습! 많이 부자가 됐다. 여행은 삶의 한 부분으로, 어느 것과도 버꿀 수 없는 나만의 소중한 경험이고, 평생 놓치지 않을 귀한 재산이니까.
떠나는 날, 아침을 먹고 호텔 정원을 산책하는데 보고자 벼르던 올리브나무들이 그룹을 이뤘다. 사진에서 본대로 버드나무 잎보다 좀 넓고 짧은데 올리브까지 조랑조랑 달려있다. 파리에선 기대했던 마로니에를 끝내 못 봐 아쉬웠는데, 이태리에선 떠나는 날 아침에 올리브를 만나 여행의 마침표를 찍게 됐다. 행운을 선물 받은 기분이다. 이렇게 나는 뭐든 간절히 보고자하면, 그리워하면, 해후한다. 신기하고 감사할 일이다.
헬렌켈러도 ‘마음껏 사랑하고 즐긴 것은 결코 잊혀 지지 않으며 자신의 일부분으로 남게 된다.’했다. 사랑이 머물다 간 자리엔 아름다운 추억이 남 듯, 우리 함께 여행한 자리엔 영원히 잊지 못할 추억이 우리의 일부분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또 이 추억은 앞으로도 계속 힘들 때마다 큰 힘이 돼줄 것이다. 사람이란 살아온 날들을 다 기억할 수 없지만, 소중한 것은 절대 잊지 못한다. 고로 여행의 기억들은 가슴에 각인돼, 남은 삶의 골목골목에서, 내 삶의 날선 굽이굽이마다, 살며시 나를 보듬어 줄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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