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야말로 장엄한 한 편의 서사시였다. 30년간 노동자 권익을 위해 싸우던 조준호 통합 진보당 공동 대표가 같은 당 새내기 여성 당원에게 머리털을 뽑혔다. 노무현의 ‘정치적 경호실장’으로 불리던 유시민 공동 대표는 심상정 공동대표 겸 중앙위 의장이 폭행당하려는 순간 온 몸을 던져 경호하다 안경이 날아갔다(이 친구는 전생에 경호와 깊은 인연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털 뽑힌 조준호와 이를 지켜본 유시민 심상정은 두려운 마음으로 황황히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지난 12일 일산에서 열린 통진당 중앙위 회의장에서 일어난 일이다.
폭력 사태가 일어나기 직전 또 하나의 공동 대표이자 유일한 당권파였던 이정희는 재빨리 대표직에서 사임한 후 회의장을 떠나 우연의 일치로 화를 면했다. 이정희는 사건이 터진 다음 “침묵의 형벌을 달게 받겠다”는 시적 취향이 물씬 풍기는 미사여구로 사태를 마무리 하려 했으나 어쩐 일인지 진보 진영에서 그녀를 보는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차가운 정도가 아니라 부글부글 끓고 있다. 그녀가 입당시킨 ‘가카빅엿’ 서기호 전 판사마저 그녀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한 때 ‘진보’의 아이콘이자 귀염둥이 아이유였던 그녀는 요즘 끝없이 추락하고 있다.
이번 사태를 보고 더 열을 내는 것은 진보 진영이다. 진보 진영의 한 대표 논객은 “오늘 이 땅의 진보는 죽었다”는 사망 진단서를 썼고 지난 번 통진당에 표를 준 유권자들도 “표를 찍은 손모가지를 부러뜨리고 싶다”며 울분을 터뜨리고 있다. 왜 안 그렇겠는가. 전두환 폭압 정치와 싸우며 30년 동안 쌓아온 탑이 한 순간에 무너지게 생겼는데. 그것도 ‘패악 무도한 이명박 독재 정권’이 아니라 명색이 같은 ‘진보’를 표방하는 ‘동지’ 손에 의해서 말이다.
그러나 종북 주사파가 버티고 있는 당권파의 과거 행적을 보면 이번 사태는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무고한 시민을 프락치로 몰아 때려 죽였고 민노당 창당 때부터 부정 선거를 밥 먹듯 저질러 왔다. 민노당 시절 최기영이 민노당 회원 명부를 북한에 넘겨 유죄 판결을 받고 감옥에 갔음에도 나오자 통진당 정책위원장으로 앉혔다.
그들은 이번 총선에서 그토록 증오하는 재벌들이 흔히 쓰는 순환 출자 방식으로 대한민국을 접수하려 했다. 1~2%의 지분으로 그룹 전체를 말아먹는 전술 말이다. 우선 노회찬, 유시민 같은 대중 정치인을 영입, 표밭을 넓혔다. 그 다음에는 야권 연대로 범야 공동 전선을 구축했다. 예상대로 새누리와 민주통합당이 절반씩 의석을 나눠 가지고 자신들이 캐스팅 보트를 쥐었더라면 당의 주도권을 장악한 종북 주사파가 대한민국 국정을 좌지우지할 뻔 했다. 천우신조로 ‘막말의 지존’ 김용민이 나와 이를 막았고 이번에 조준호 등 엉뚱한 인물들이 선거 부정을 들고 나와 깽판을 친 것이다.
당권파들 입장에서 보면 좀 억울하게는 됐다. 이들이 원주인인데 굴러온 돌이 박힌 돌을 쳐내려 하니 말이다. 단 칼에 한국 정치를 환경 친화적 ‘석기 시대’로 돌려놓은 당권파의 수괴 이석기 말대로 100% 부정이 없는 선거가 어디 있나. 어제오늘 일도 아닌데 그동안 고생한 당원들에 대한 애정도 전혀 없이 있는 그대로 부정행위를 다 까발려 뭘 어쩌자는 것인가. ‘심판 받기 싫으면 심판하지 말고 죄 없는 자 돌을 던지라’는 예수 말씀도 못 들어봤나.
통진당 비당권파는 강기갑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를 구성, 당을 새로 꾸며 보겠다고 한다. 강기갑은 국회에서 붕붕 날며 ‘공중 부양’ 묘기를 선보인 인물이다. 아마 그 신통력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모양인데 잘 안 될 것이다. 당권파에는 국회 회의장에 최루탄을 던진 ‘이 시대의 안중근’ 김선동 같은 거인들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통진당 당권파와 비당권파는 서로 집은 나가지 않겠다면서도 싸움은 멈추지 않을 기세다. 나가봐야 재산 분할은커녕 위자료 한 푼 못 받고 찬밥 될 게 뻔한데 왜 나가겠는가.
12일 있었던 통진당 난투극은 그 동안 ‘진보’의 실체를 몰랐던 국민들의 눈을 뜨게 해준 역사적 사건이다. 몰랐던 국민들은 그렇다 치고 알면서도 ‘진보’라는 이름을 걸쳤다고 이들을 비호해 온 수많은 인간들은 지금이라도 국민 앞에 무릎 꿇고 사죄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아직은 대한민국을 버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든다.
<민경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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