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뉴욕필하모닉 디즈니홀 공연 리뷰
▶ 170년 역사 최고령 오케스트라 차이코프스키 4번 등 감미로운 레퍼토리 알란 길버트의 섬세한 열정 느껴져
뉴욕 필하모닉의 알란 길버트 상임지휘자가 9일 디즈니홀에서 드보르작의 카니발 서곡을 지휘하고 있다.
어쩌면 소리가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을까? 과연 미국 최고의 교향악단이다. 9일 월트 디즈니 콘서트홀에 울려퍼진 뉴욕 필하모닉의 사운드는 길이 아주 잘 든 물레에서 수백가닥의 곱고 가는 명주실을 뽑아내는 것 같았다. LA필하모닉의 소리와 비교하자면 그리스와 르네상스의 차이라고 할까. 뉴욕필이 고대 그리스의 완벽한 아름다움을 구현한다면, LA필은 이를 재현한 르네상스 예술과 같아서, 젊고 신선하긴 해도 그 절대적 미감에는 아직 미치지 못한 아쉬움을 갖게 한다.
이날의 스타는 단연 알란 길버트(45·Alan Gilbert)였다. 알란 길버트는 LA필에 구스타보 두다멜이 부임한 2009년 9월 뉴욕필의 뮤직디렉터로 취임함으로써, 같은 시기에 젊은 무명의 지휘자들을 수장으로 맞아들인 동부와 서부의 양대 오케스트라는 지난 3년간 피할 수 없는 화제와 비교의 대상이 되어왔다.
그런데 LA필이 두다멜을 열렬히 환영한 것과는 달리, 당시 뉴욕필은 이탈리아 거장 리카르도 무티를 모시기 원했으나 무티가 거절하자(그는 다음해 시카고 심포니로 갔다) 차선으로 길버트를 선정한 것이었다, 그것도 LA필이 두다멜의 선정을 발표한지 석달만에 마치 피어 프레셔라도 느낀 듯 길버트를 상임지휘자로 공표함으로써 자연히 두사람은 미국에서 가장 비교되고 주목받는 신예들로 떠오르게 된 것이다.
두다멜과 길버트는 둘다 에사 페카 살로넨(LA필 계관지휘자)이 영적 대부라 할만큼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또 둘은 친구로서 좋은 관계를 갖고 있다고 하니(이날 디즈니홀 청중석에 두다멜이 앉아 감상하는 모습이 보였다) 이들의 비교는 지휘자들의 경쟁이라기보다는 동부와 서부의 문화적 자존심의 대결, 미국의 가장 오래된 오케스트라와 가장 혁신적이며 21세기의 모델 오케스트라로 꼽히는 오케스트라의 대결인지도 모르겠다.
말러와 토스카니니, 스토코프스키와 번스타인이 지휘했고 로린 마젤과 함께 역사적인 평양 공연도 가졌던 뉴욕 필은 170년 역사를 가진 미국내 최고령 오케스트라이다. 알란 길버트는 그런 뉴욕필 사상 첫번째 뉴욕 출신 지휘자이며 사실상 뉴욕필의 가족이나 다름없는 배경을 가졌다. 부모가 모두 뉴욕필의 바이올린 주자로서 아버지는 2001년 은퇴했으나 어머니(요코 다케베)는 현 단원으로서 이번 투어에도 동행했다. 또 여동생 제니퍼는 프랑스의 리옹 내셔널 오케스트라의 악장으로 활동하고 있으니 온가족이 바이올린 패밀리인 셈이다.
하버드 대학과 커티스 음대, 줄리어드 스쿨에서 바이올린과 비올라, 지휘를 공부한 알란 길버트는 어릴 때부터 부모를 따라 연주장을 내집처럼 드나들고 해외투어까지 따라다닌 덕택에 뉴욕필만의 언어와 정서를 온몸으로 이해하는 지휘자로서 단원들의 무한한 믿음과 신뢰를 얻고 있다.
처음에는 세계적 노장들이 이끌어온 보수적이고 터프한 뉴욕필을 그가 과연 감당해낼 수 있을까하는 회의적인 의견도 었으나 이러한 우려는 첫 시즌이 끝나면서 청중과 평단으로부터 고루 좋은 평가를 받으면서 사그러들었다. 신중하고 사려깊은 성격으로 알려진 길버트는 조용한 혁명으로 뉴욕필에 젊은 기운을 불어넣고 있으며, 보수적이고 고령화된 뉴욕 필과 청중 문화를 변화시킬 적임자로서 아주 좋은 선택이었다는 것을 시간이 갈수록 확실히 증명하고 있다.
1999년 이래 LA를 처음 찾은 뉴욕필은 이날 드보르작의 카니발 서곡과 차이코프스키의 4번 교향곡, 그리고 뉴욕필 상임작곡가인 매그너스 린드버그(Magnus Lindberg)의 피아노 협주곡 2번을 거장 피아니스트 예핌 브론프만(Yefim Bronfman) 협연으로 미서부지역 초연했다.
이 프로그램은 뉴욕필의 다채로운 역량을 충분히 보여줄 수 있는 화려하고 감미로운 레퍼토리였으며, 알란 길버트는 투사처럼 격렬하고 열정적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어감으로써 무한히 명징하고 우아하고 풍요로운 연주를 들려주었다.
특히 차이코프스키 심포니 4번은 처음부터 끝까지 목관들의 활약이 돋보이는 교향곡인데 오보, 클라, 바순, 플룻 주자들이 얼마나 기막히게 잘하던지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다. 게다가 한치의 틈도 없이 짱짱하게 울려주는 금관의 파워와 교향곡 전체의 멜로디를 튼튼하고 우아하게 받쳐주는 현의 일사불란한 울림은 연주를 듣는 내내 엄청난 전율을 느끼게 했다.
한사람 한사람이 모두 솔로이스트라 해도 좋을 뛰어한 개인기를 갖춘 단원들 중에는 LA출신의 미셸 김 부악장을 비롯해 한인 연주자들도 현악파트에서 약 10명이 활약중이어서 감격과 친밀감이 더했다.
뉴욕필과 알란 길버트는 언제 다시 오려나. 이들 외에도 미국의 5대 교향악단으로 꼽히는 보스턴 심포니, 시카고 심포니, 클리블랜드 오케스트라,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의 연주도 디즈니홀에서 직접 들어볼 수 있는 날을 꿈꿔본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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