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봄처럼 화사한 르네상스의 본고장
▶ 중세 유럽 무역 금융중심지. 역사 흐름 바꾼 천재들의 출생지
베니스에서 55km 떨어진, 문화와 예술이 숨 쉬는 고풍의 도시 피렌체<플로렌스>로 간다. 토스카나의 주도인 피렌체란 이름은 ‘봄처럼 화사한’, ‘꽃의 도시’라는 의미다. 중세유럽의 무역 금융 중심지였고, 르네상스시대의 건축과 예술의 본고장이었다. 르네상스라는 근대정신의 길을 열어 역사의 흐름을 바꾼 천재들인,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보카치오, 단테, 갈릴레이,
라파엘로의 출생지다. 또 르네상스를 꽃 피게 주도한 메디치 가문의 영향이 지대했던 곳이다. 현대엔 질 좋은 가죽과 남성복패션의 진원지로 유명하다.
해바라기로 각인된 토스카나의 드넓은 구릉과, 길쭉한 형태의 전나무와 적갈색 지붕의 전형적인 토스카니 양식의 집들이 어우러져 그림엽서감이다. 영화 ‘Under the Tuscan Sun’에서 보이던 들과 농가들의 모습 그대로라 반갑다. 세계에서 우리나라 산세랑 가장 비슷한 곳이 이태리고 그중에도 토스카나지역이다. 소나무가 유독 많은 점도 같지만, 기개가 드높은 우리 소나무랑은 전연 다른, 포근한 자태의 우산소나무다. 몸통이 곧게 올라가다가 윗부분만 가지를 뻗어 동그란 형상으로 잎들이 퍼져나가 마치 버섯모양 아니 정말 우산이다. 인위적인 조경 덕이냐고 가이드께 물으니 자연적인 형태가 그렇단다. 키가 크면서 아래 가지들이 저절로 부러지거나 그전에 쳐주기도 한단다. 하여간 매력만점의 소나무다.
피렌체에 도착해 식당으로 가기 전, 가이드님이 발목지뢰를 밟지 않도록 극구 조심하란다. 밟게 되면 버스 안에 냄새가 밴다며 기사가 질색한다나. (이태리는 관광버스 기사들이 차주라 버스를 무척 아낀다.) 그 발목지뢰가 실은 개나 고양이 똥이다. 농담으로 웃어넘길 일이 아닌 게, 작은 돌이 깔린 길바닥이 개똥세상이다. 진짜 비 오는 날 마른땅 골라 딛기다. 미국처럼 개똥벌금 제도가 없는 탓이다. 개똥벌금 제도가 필요조건인 건 확실하다. 피렌체의 뒷골목은 중세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더니 실지로 그랬다.
도시개발억제정책으로 근대적 고층빌딩이 없는, 과거에 멈춘 천연기념물급도시인 걸 금방 알아채겠다. 꼬불꼬불 후미진 좁은 골목길엔 골동품급의 소박한 구멍가게들이다. 세월이 어린 장소와 길이 우리 옛날 청진동 뒷골목 같아 정겨움이 느껴진다. 이렇게 음습하고 좁은 뒷골목에 위치한 식당이 오죽할까했더니, 우려와 달리 식당은 넓고 깨끗하다. 와인과 모짜렐라 치즈, 음식 맛으로 명성
이 자자한 피렌체답게, 스파게티가 밀라노 식당보다 감칠맛이 더하다.
골목길 사이에 조그만 마당이 나왔다. 13세기 시성인 단테의 생가 앞이다. 생가는 소박하고 낡아보여도 가로로 된 돌담에 중간 중간 세로로 돌을 박은 지진대비형설계란다. 문 옆의 담에 조그만 단테의 흉상이 있는 받침대가 나와 있다. 신곡을 썼지만 유명한 정치가였기에 당쟁에 휘말려 피해 다니느라 피렌체를 떠나 객사한 불우했던 극작가다. 그래도 이렇게 이국의 관광객들이 추모하고 있으니 위로가 좀 되려나? 아시아 관광객들의 통과지역인지, 애를 업은 집시여자가 빈 그릇을 들고 마분지 쪽지를 내보인다. 쪽지엔 ‘도와주세요’란 한글과 중국어, 일어가 써있다. 하도 소매치기요주의에 겁먹다보니 접근할까 지레 긴장됐다.
삥 둘러서서 안내 설명을 듣는 와중에 옷과 모자, 손, 얼굴까지 회색빛 일습의 젊은 남자가 빗자루를 들고 움직인다. 생가의 굴뚝청소분가? 무심히 보는데 갑자기 상자위에 올라가더니 빗자루 들고 돌연 동작정지다. 은분 칠한 동상족이다. 미처 그 남자의 일거일동을 주시 못했던 일행들이 몰려갔다. 길거리에 하도 동상이 흔하니까 “단테 동상이다” “사람이다”의견들이 분분했다. 박이 영어로 “눈을 깜빡여보라”했더니 잘생긴 동상족이 살짝 윙크를 했단다. 모두들 웃으며 앞에 놓인 그릇에 동전들을 놓았다.
중세도시의 편안함에 젖어 골목을 걷다가, 느닷없이 툭 터진 공간과 맞닥뜨림과 동시, 와글거리는 사람들로 깜짝 놀랐다. 가이드님이 “이게 170년이나 걸려 완성된 피렌체의 두오모(사진)입니다” 하며 앞 건물을 가리켰다. 꽃의 성모마리아란 뜻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었다. 하도 거대해 고개를 한껏 제처도 돔까진 안 보인다. 400만개 이상의 벽돌을 사용한 돔은 106m로 세계 제일 크고, 역사상 최초의 8각형 석재 돔이다. 돔과 랜턴(돔 위에 빛을 받아들이는 작은 첨탑)의 높이만도 114,5m다. 랜턴 위에 구리공이 있었는데 벼락을 맞아 더 큰 것으로 교체했단다.
13세기 건축물중 가장 아름답다는 성당의 외관은, 흰색, 녹색, 붉은 갈색 대리석이다. 처음 보는 순간엔 이태리 국기의 상징의미로 페인트칠한 걸로 추정했다. 그런 예쁜 색상의 천연 대리석이 있을 줄 몰랐으니까. 밀라노처럼 날카로운 첨탑이 없어 그런지 늠름한 기사이미지다. 그래서 밀라노의 두오모는 섬세하고 여성적인데, 피렌체의 두오모는 선이 굵고 남성적이라고 하나보다. 성당이 장엄한 거에 비례해 광장이 비좁아 안정감이 덜하다. 광장은 건물의 그림자그늘이 꽉 차 어둡고, 돔을 넣은 전체사진 찍기도 불가능이다. 하여간 피렌체 어느 곳에서든 둥근 돔이 보인다니, 도시의 이정표역할로는 완벽임무수행이겠다.
<냉정과 열정 사이>란 책과 영화로 잘 알려진, 두오모 꼭대기에 오른 사람들이 딱 마스코트 인형들이다. 10년 후에 그곳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지키고 재회한 로맨틱한 주인공 준세이와 아오이처럼, 저들도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두오모’이기에 올랐을까? 외벽과 내벽사이 사람하나 지나갈 공간에 끝없이 이어져 있다는 463개의 벽돌계단으로 오른 거겠지. 나는 책만 보았는데, 책 구절엔 ‘꼭대기에서 보는 적갈색지붕의 일 이 천년 된 돌집들과 중세거리풍경엔, 연인들의 마음을 하나로 묶어주는 미덕이 있다’고 했다. 여자들은 나이에 상관없이 낭만을 사랑하는데, 직접 못 보고 기약한 사람도 없으니 섭섭하다.
성당 정문위에 있는 거대한 시계 네모서리엔 복음사가인 마태, 마가, 누가, 요한의 프레스코초상화가 있단다. 당시에 만들어져 아직도 작동중인 몇 안 되는 시계가운데 하나란다. 두오모 옆엔 조토
가 설계했다는 조토의 종탑이, 홀로 우뚝한 두오모의 균형을 차분히 잡아준다. 광장 오른편에 있는 11세기 8각형 건물인 성 조반니 세례당엔 3개의 문이 있는데, 동쪽 문을 ‘천국의 문’이라 한다. 거리를 두고 볼 땐 청색 틀의 문에 금색을 입혀 ‘촌스런 문’이었는데, 가까이 보니 성서내용을 뜻하는 부조들이 아주 정교하고 무게 있다. 문의 진품은 박물관에 있고 가짜라는데도 그렇다.
그다음 피렌체의 심장부인 ‘시뇨리아<행정장관의 모임이란 뜻>광장’과 ‘성 십자가<산타 크로체>성당’으로 갔다. 성당 안엔 단테의 가묘와 미켈란젤로, 갈릴레이 등이 묻혀있는데, 피렌체의 위인들 묘와 기념비가 무려 276개나 된단다. 성당 앞엔 단테 기념비가 있다. 옆에 중세 요새 같은 웅장한 건물이 ‘베키오 궁전<메디치 가문의 궁전>’인데 14세기 초에 시청사로 세워진 건물이다. 시계가 있는 망루 같은 94m의 종탑은 뾰족하니 올라와 두오모와 함께 피렌체의 아름다운 스카이라인을 형성해준다. 일테면 수세기 동안 피렌체의 정치와 사회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관공서 같지 않고 유서 깊은 박물관 같다.
베키오 궁전 입구 양쪽엔, 미켈란젤로가 4년에 걸쳐 완성한, 고대이후 남자 나체 조각상으론 가장 큰 6m의 ‘다비드상<복제품>’과, 반디넬리 작품 ‘카쿠스<소를 훔쳐간 괴물>를 죽이는 헤라클레스’동상이 있다. 자연히 두 동상이 비교가 안 될 수가 없는데, 다비드의 판정승이라 지당한 유명세다. 다비드상은 손등의 힘줄과 다리 알통의 근육, 배의 주름까지 생생히 드러나, 신비한 기운이 맴도니까. 안보고 싶을 만치 끔찍한 조각상도 있는데, 첼리니 작품으로 ‘메두사의 목을 벤 페르세우스’ 청동상이다. 하얀 네모난 기단엔 아치형으로 홈을 파고 작은 청동조각상들까지 새겨 예쁘다. 그런데 그 위는, ‘한번 쳐다보면 그 자리에서 사람이 돌로 변한다’는 흉측한 여자괴물 ‘메두사’의 잘라진 목을 왼팔로 치켜들고 오른 손엔 칼을 들고 있다. 메디치가의 막강한 권력의 힘을 우회적으로 표현한 거란다.
‘란치회랑’은 우피치<오피스란 뜻>미술관과 연결된 이른바 야외미술관이다. 기역자형태의 두면이 막히고, 니은자형태의 두면은 벽이 없고 아치기둥만 있다. 원주회랑 안에 있는 15개의 동상은, 메디치가문이 시민들에게 경고의 의미로, 투쟁적인 내용의 신화를 묘사한 조각들이란다. 맨 앞에 사자상이 두 개가 있는데, 공 같은 것에다 하나는 왼발을, 하나는 오른발을 올려놓았다. 메디치가는 무소불위의 권력으로 역기능도 있었지만, 가문의 소장품을 기부하며 절대 피렌체 밖으로 내놓지 말라는 유언으로 진정한 애국자가 된 셈이다. 그 덕에 도시자체가 박물관이니까. 개인의 사후 처신에 따라 사회에 끼치는 여파가 무한대일수 있다는 물증이다. 청동 기마상의 ‘코지모 메디치’ 얼굴이 다시 보인다.
로마상징영화엔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암만나티 작품인 ‘냅튠 분수’다. 분수가운데는 그리스 신화의 12신중, 바다를 다스리는 포세이돈의 흰 대리석동상<복제품>이 있다. 기단엔 고개가 각기 다른 방향인 네 마리의 대리석말이 볼만하다. 원형의 분수 가에는 청동상으로 된 물의 요정들이 물고기, 조개, 고래와 더불어 있다. 동화속의 바다세계다. 이태리 중남부의 특징은 언덕에 마을이 모여 있는 거다. ‘미켈란젤로 언덕’이란 곳에 올랐다. 다비드상이 눈에 확 들어온다. 진품은 피렌체미술관에 있고 이것도 복제품이라는데, 더 좋을 수 없이 근육이 살아있어 진짜랑 뭐가 다를까 싶다. 언덕아래엔 피사로 흘러가는 아를로 강이 고요히 흐른다. 세느강보다 좁은 강 주변엔 적갈색 지붕들만 아기자기 머리들을 맞대고 있다. 쑥 머리를 쳐들은 빌딩은 물론이고 툭 이마를 내민 아파트도 전무라, 겸손하고 고즈넉한 심성의 경관이다. 국보격인 아름다운 고도의 모습이 한 없이 포근하고 안정감을 준다. 정신없이 빠르게 쫓기듯 살아야 되는 현대도시와는 달리, 여기선 어쩐지 느리게 여유롭게 살아도 될 것 같다.
강 위에 걸린 다리의 자태도 빼어나다.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되고 예쁘다는 베키오다리다. 주위의 전형적인 적갈색 지붕들과 절묘할 만큼 어울린다. 세계 2차 대전 때 아르노강의 다리들 중 유일하게 독일군의 손을 피해 목숨을 부지한 다리다. 또한 9살의 단테가 8살의 베아트리체를 보고 첫눈에 반했다는 다리라, 지금도 사랑을 맹세하는 연인들의 장소란다. 아치위론 창문들과 지붕이 이어진, 말하자면 다리집이다. 다리 중심에 있는 세 개의 아치는 뚫려있고, 다리 한쪽 끝은 지붕이 기역자형으로 강가의 우피치 미술관과 연결돼 조화의 묘를 보여준다. 아래층은 상가고 2층은 금, 은, 보석세공품의 갤러리다. 전부들 일급배경감인 명이 긴 다리를 뒤로하고 사진을 찍었다.
그런데 새파란 풀들 사이로 진분홍빛 당아욱꽃들이 민들레와 자웅을 겨루고 있다. 잎이 분명 아욱인데 꽃은 제라늄이라 영어 이름은 ‘워싱턴 제라늄’이다. 금년 처음 화단에 키워본 꽃을 여기서 재회하니 반갑다. 햇살이 달라 그런지 야생화로 자라 그런지 키들이 작다. 시내를 돌아보니 유네스코 세계유산인 만큼 집들이 다 예쁘다. 가차이보면 폐가처럼 낡은 집들임에도 관광객들을 위해 보존해야한단다. 관광업에 의지해 살아야하는 숙명이다. 시내로 자전거 왕래가 많은지 빨간 칠로 구분한 전용도로가 2차선으로 넓다. 조금만 외곽으로 나가면 숲이 많은데, 영화 ‘검투사’에서 양편에 싸이프러스 나무들이 쭉 도열한 길을 주인공이 말 타고 들어가는 장면을 찍은 숲도 있단다. 실지로 보면 멋있을 텐데...
토스카나의 전원풍경에 반해 차창에서 눈을 떼지 못하는데, 멀리 산 정상에 마을과 하얀 성당 건물이 예사롭지가 않다. 유명한 아씨씨란다. 일정에 없으니, 아무리 돋보이고 못가본 길이 더 아름다워도, 이렇게 멀리서 안녕할 밖에 없다. 사진으로나마 남기려는데 사진기가 작동정지다. 베니스에서 배를 타고 비를 맞으며 사진을 찍어 선가? 고장의 원인도 모른 체 가슴에 큰 돌덩이만 얹혔다. 식당에서 후배부군님과 가이드님께 조언을 구해봤지만 사진기는 요지부동이다. 좌석관계로 우리 팀과 떨어져 필라델피아에서 왔다는 남자 두 분과 합석하게 됐다. 30대중반의 아들과 70대의 아버지였다. 몇 년 전 홀로 되신 아버지를 모시고 사는 아들이, 부인과 애들은 집에 두고, 아버지만 모시고 온 위로여행이었다. 친구처럼 농담하고 세세하게 아버지를 챙겨드리며 식사하는 모습이 너무 따뜻하고 정겹다. 너무 부러워서, 성큼 회한이 밀려와서, 마음이 저려온다.
서경에 보면 ‘나무는 조용하기를 원해도 바람이 그치지 않듯이, 자식이 효도를 하려고 원해도 부모는 기다려주지 않는다.’는 말이 나온다. 나 역시 못 다한, 아니 전혀 안 해본 효도 때문에 가슴이 먹먹해진다. 호텔로 와서, 출발하는 날 아들애가 긴급메일로 부쳐준 새 메모리 칩으로 교환해 봐도 무변동이다. 내일은 여행의 노른자인 로마관광인데 어쩔거나! 부모님께 불효한 죄스러움까지 합쳐 이 밤은 꽤나 우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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