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년 전 봄, 난 새로운 특집을 기획하고 있었다. 낯선 땅에서 앞만 보고 달려가는 우리들이 “난 과연 잘 살고 있는 것일까”란 의문에 부딪쳤을 때 자신의 삶에서 발견 못한 해답을 어쩌면 이웃의 일상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소박한 의도에서 출발했다. 매주 각계각층 한인들의 이민생활을 조명할 ‘우리들의 삶’ 프롤로그 기사를 마감한 다음 날 ‘사이구 폭동’이 터졌다.
경찰의 정지명령을 무시한 채 과속 음주운전을 하다 붙잡힌 흑인청년 로드니 킹을 무자비하게 구타한 4명의 경찰에게 무죄평결이 내려졌던 1992년 4월29일 수요일이었다. 그 후 사흘 LA는 밤낮없이 방화와 폭력과 약탈이 미친 듯이 날뛰었던 무법의 천지였다. 2,300여개의 한인업소가 파괴되었고 후에 집계된 시 전체 피해액 10억달러 중 거의 절반이 한인 소유였다.
첫 취재는 “짓밟힌 아메리칸 드림의 파편들이 어지럽게 널려있는, 부서지고 타버린 약탈의 현장”에서 이루어졌다. 취재원과 기자이기에 앞서 ‘상처 입은 동족’이라는 끈으로 묶여 분노와 허탈…그 절박한 감정들을 공유하며 소개한 폭동 피해자의 스토리로 ‘우리들의 삶’은 시작되었다.
1960년대 유학생으로 도미한 그에게 ‘한흑 갈등’은 설득력 없는 개념이었다. 물건을 훔치거나 마약에 취해 행패부리는 고객은 경찰을 불러 넘겨주었고 이웃 단골들과는 늘 농담을 건네며 악수를 나누었던 ‘보통 업주’였다. 2개 주유소 10여명 종업원 중엔 한인과 흑인, 히스패닉이 다 섞여 있었다.
주류미디어가 한흑 갈등을 아무리 그럴듯한 원인으로 분석해 붙여도 그는 이해하기 힘들다고 했다. 이 땅에 뿌리내려온 그의 삶의 대표치는 ‘열심히 일한 것’이었다. 남들이 쉴 때도 일했고, 남들이 잘 때도 일했으며 남들이 휴가 갈 때도, 파티 갈 때도 그는 열심히 일했다. 대부분 피해 한인들처럼 빈손으로 시작했지만 열심히 일했기 때문에 잘 살 수 있었다. 그것이 방화와 약탈을 당할 만큼 잘못일 수 있는가, 무자비한 약탈에 대한 공권력의 방관을 정당화시키는 구실이 될 수 있는가…반문했던 그는 속 시원한 대답을 듣지 못한 채 지금은 고인이 되었다.
93년 8월 로드니 킹 재판 재심 결과 2명의 백인경찰에게 징역형이 내려진 후 “어두운 역사의 한 페이지가 덮어졌다”는 미디어의 결론을 들으며 한영숙씨는 마음이 편치가 않다고 했다. “아무 상관도 없이 매 맞은 우리는 아직도 길에 엎어진 채 피 흘리고 있는데 때린 사람들끼리 덮어버릴 수 있는 겁니까” 간암으로 남편을 잃어버린 슬픔에서 채 벗어나기도 전에 그는 22년 이민생활의 결실이었던 ‘내 가게’를 폭동으로 잃어버렸다. 영업을 재개하지 못해 옛 직업인 간호사로 되돌아갔던 그는 지금은 은퇴했다고 피해자 모임이 그의 소식을 전한다.
‘사이구’로 삶의 뿌리가 흔들린 한인들은 약 1만명으로 추산된다. 그러나 억울하게 상처 입은 이들의 호소에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주는 곳은 없었다. 폭동 1주년, 5주년, 10주년…흑백문제를 대서특필하는 주류 미디어의 특집은 이들의 아픔을 생략했고, 대통령에서 시·주·연방의 정치가들이 찾아와 다짐했던 약속들은 대부분 실현되지 않았다. ‘우리들의 삶’이 해마다 찾아갔던 이들의 재기는 그래도 씩씩하게 이루어지고 있었다.
10년 저축으로 마켓을 인수한지 넉 달 만에 폭동을 당하고 은행 빚 안고 재개한 마켓에서 열 달 후 남편을 흑인 강도 총에 잃은 고현자씨도 의연하게 삶터를 지키고 있었다. 여릿여릿 고운 모습의 그는 눈물은 자꾸 흐르지만 “누구나 나만큼은 힘들게 살 것이다”라고 스스로 타이르며 기운을 챙긴다고 했다.
폭동 4주년에 만났던 이일남씨는 방탄유리 안쪽에서 햄버거를 굽고 있었다. 파산을 고민하고 있다던 그는 안부를 묻기가 미안할 정도로 지쳐 보였지만 한번 환하게 웃었다. “제 부모처럼 힘없는 한인들을 돕겠다고 우리 둘째가 경찰관이 되었습니다”
밤에는 청소하고 낮에는 남의 마켓에서 고기 썰며 12년간 죽어라 모은 65만달러로 마련했던 마켓을 폭동에 잃고 난 후 2년 반 동안 무리한 재영업 조건과 맞서 필사적으로 투쟁했으나 결국 빈손으로 떠나야했던 주성호씨(59)는 지금은 하와이언 가든에서 리커스토어를 운영하고 있다. 폭동 한 달 전에 태어났던 작은 아들은 대학생이 되었고 힘든 아버지를 위로하느라 맥도날드를 지나며 “아빠, 나 지금은 안 먹고 싶어” 하던 8살 큰 아들은 식당을 개업했다. 그들을 보며 희망을 생각한다는 그는 SBA론을 갚으려면 17년은 더 일해야 한다면서 “은퇴 없는 삶이지요”라고 쓸쓸히 웃었다.
당시 폭동의 최대 피해자였으면서도 폭동의 원인제공자라는 오명까지 뒤집어썼던 한인들은, ABC-TV의 시사프로 ‘나이트 라인’에 출연해 힘없어 침묵하는 자신들을 대변하던 앤젤라 오 변호사를 지금도 눈물겹게 기억한다. 폭력과 약탈의 표적이 되었던 피해자들의 좌절과 공권력이 보호해주지 않아 스스로 무장하지 않을 수 없었던 상인들의 공포를 명료하게 짚어가며 미디어의 왜곡보도에 강력하게 항의하던 그는 한인들의 “웅변적 대변인”이었다.
폭동 후 20년 동안 우리는 많은 것을 배웠다. 몇 번이나 무고한 희생양을 번제하고서도 아직 분노를 다 삭히지 못한 미국의 흑백역사를 체험했고, 서로를 존중하는 타인종과의 공존자세도 열심히 익혀가고 있다. 정치력이 있어야 제대로 대접받을 수 있다는 다민족 사회의 생존 법칙도 깨달았다.
그러나 우리는 누가 뭐래도 무고한 피해자다. 경찰의 눈앞에서 약탈당하면서도 공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했고 정당한 보상 또한 받지 못한 이 나라의 성실한 납세자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정부당국의 공식사과는 받아내야 한다.
폭동 1주년 무렵에 만났던 오변호사는 자신은 한인사회의 대변인이 아니라 한인사회의 ‘미래’라고 말했다. 그는 “앞으로 20년 후 여러분 자녀의 모습을 보고 싶다면 지금의 나를 보십시오. 그때는 수백수천명의 앤젤라 오가 한인사회를 이룰 것입니다”라고 예언했다. 언젠가는 그 수백수천명의 앤젤라 오들이 부모세대 희생에 대한 공식사과를 받아내고 ‘사이구’의 역사를 바로 잡아 줄 것이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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