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선문 앞에서 친구들과.
<파리 편> 드디어, 우아하고 매혹적인 여인이라는,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던 파리에 왔다. 파리는 한기와 이슬비까지 안기며 쌀쌀맞게 환영>한다.
샤를 드골<에투알>광장에 있는, 완공에 무려 30년이나 걸렸다는 개선문이다. 머릿속으로 추정된 크기보다 엄청 웅대해 놀랍다. 승강기와 계단을 이용해 꼭대기에 올라간 사람들이 전부 개미군단들이다. 양쪽 기둥에 장군들의 이름과 나폴레옹 승전기념 부조의 돋을새김이 아주 정교하고 생동적이다. 365일 내내 켜져 있다는 무명용사무덤횃불이 꽃에 쌓여있다. 한국전과 연관됐다면 마음이 아릴 텐데, 눈인사만 건네지는 담담함이 문득 죄스럽다.
세계에서 제일 호화롭다는 베르사이유 궁전에 도착했다. ‘짐이 곧 국가’라고 했던 루이 14세가, 22년에 걸쳐 완성한 바로크양식의 일등궁전이다. 높은 철창대문의 윗부분과 옆에 금색 칠을 입혀선지 철옹성 권력의 이미지로 사람을 압도한다. 내부는 벽, 복도, 천장, 모서리까지 유려한 색감의 그림과 문양, 조각, 동상들로 빈 여백이 한군데도 없다. 질릴 정도로 화려해 입이 벌어진다. 17개의 대형거울과 17개의 창문이 있는 거울의 방에 갔다. 천장의 휘황찬란하고 거대한 샹들리에들이 놀랍고 눈부신데, 양옆에 정렬한 동상마다 횃불처럼 들은 현란한 샹들리에들이 내뿜는 빛까지 더해 어질어질하다. 과연 호화스러움의 극치다.
무도의 방에서 내려다본 드넓은 인공정원이 250만평이라니 충격이다. 세느강 물을 끌어온 사각형의 인공호수들과 물줄기를 내뿜는 조각상분수까지, 혼자 보기 아까운 전경이다. 그런데 이다지도 어마어마하게 꾸며놓고는, 행복하게 오래오래 잘 살았냐하면 정반대였다. 끝없는 암투와 질시로 단두대의 이슬로 사라진 왕과 왕녀도 있으니까. 겁날 만큼 찬란한 이 궁전이야말로, 인간의 끝 모를 허영과 욕심의 허황됨을 반면교사 시켜주는 실증일 뿐이다. 밤에 대망의 에펠탑으로 갔다. 만국박람회 때 귀스타프 에펠이 지은 거라 이름이 ‘에펠’인데, 뜻은 ‘보기 좋은 사람이나 경치’란다. 건립당시엔 지식인들의 단합반발로 철거위기에 내몰렸단다. 그러던 차, 전쟁 중에 모든 송신수단이 먹통인 때, 에펠탑만이 송출탑 기능을 해줘 그 공로로 구사회생 했단다.
모파상이 늘 에펠탑의 식당에 오기에 그렇게 못마땅해 하면서 왜 매일 오느냐 물었단다. 모파상 왈, 에펠탑꼴이 안 보이는 데는 여기뿐이니까 했다나. 그 일화를 증명하듯 철 구조물은 하도 높고 거대해, 원치 않아도 어디서든 눈에 들어오겠다. 파리의 대명사자격이 충분할 만큼, 예상보다 우람하고 멋져서 은근히 놀랐으니까. 더구나 낮엔 철탑에 불과했지만, 밤엔 푸른빛 도는 황금색다이아몬드로 치장한 금탑으로 변한다. 갑자기 사람들이 “와!”함과 동시에 주변이 환해졌다. 황금색 조명 옷을 입은 탑의 심장에 하트모양의 루비네온사인이 ‘팍’ 켜졌던 것. 낙엽처럼 바싹 마른 마음에도 순식간에 매화꽃이 활짝 피듯 환하게 만드는, 신비스런 사랑의 신호였다. 런던아이가 에펠탑과 견준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전망대에서 본 파리시내는 금싸라기가 뿌려진 꿈속의 도시다. 파리에서 제일 큰 돔인 앵발리드 황금색 돔이 중심을 멋지게 잡아줘, 오밀조밀 조화와 균형미가 돋보인다. 모든 건물을 7층높이로 규제한 덕도 크겠다. 어느 시인의 ‘파리는 어느 한 곳도 손이 안 미친 곳이 없다’는 표현에 이의를 제기할 사람은 없겠다. 그야말로 완벽한 조화의 아름다움 앞에, 내게도
이런 순간이 도래 했다는 감격에, 눈이 다 젖는다. 최고의 아름다움은 원래 그리움과 슬픔을 선사해주니까. 저녁 후 10시 넘어 연인의 강인 세느강 유람선에 승선했다. 낮에 버스를 타고 다리를 건너며 보았던 세느강! 런던의 템스강 보다 좁고 물이 탁해 실망스럽던 강! 그 강이 밤을 맞아 환골탈퇴다. 안내언어 중에 반갑게도 한국어가 나와 어깨가 쫙 펴진다. 조그만 섬에 너무도 턱없이 작은 자유의 여신상 있는 근처가 시발점이다. 배는 세느강의 물살을 가르고 내 마음의 물살에도 파문을 일으키며 나아간다. 금색으로 온통 치장해 가장 화려하고 아름답다는 알렉상드로 3세 다리다. 밤에 조명발로 드러나는 금색은 자못 신비하고 영험한 기를 발산한다. 날개달린 황금말의 조각상과 황금촛대의 여신상들은, 신의 왕국을 안내키 위해 다리에서 기다리는 사신들로 여겨진다. 가로등조차 예술 그 자체로 우아함을 뽐낸다.
강가에 늘어선 유서 깊은 건물과 귀족적인 집들이 하나같이 무게감이 돋보인다. 찬란히 유래되고 보존해온 고유의 유적들이라 한시도 눈을 못 떼겠다. 한강변의 주변 풍정 이미지가 삭막한 몰개성 아파트군인 게 떠올라 속상하다. 무작정 지을 게 아니라, 멀리, 길게 보고, 깊게 고민했어야했는데. 또 장대한 허드슨강가의 맨해튼 마천루 야경이 아무리 멋져도, 저 중후하고 고고한 숨결이 서린 세월의 멋은 따라갈 수가 없다. 굳세게 자연의 풍상과 세상풍파를 버텨온 ‘무궁한 역사의 몫’은 도저히 흉내 낼 수 없는 게 자명하니까.
130년에 걸쳐 지었다는 노틀담 성당이 바로 코 앞 절벽위로 우뚝 모습을 드러냈다. 노틀담은 ‘성모마리아’를 뜻하는 말이다. 남쪽 탑엔 빅토르 위고의 <노틀담의 꼽추>에 등장하는 큰 종이 실제로 달려있단다. 곱추 콰지모도가 “에스메랄다!” 절규하며 뛰어내릴 것 같은 애잔함에 자꾸 뒤돌아보게 된다. 그런데 좀 이상하다. 되가는 길에 다시 웅장하고 단아한 노틀담이 나타났는데, 거리상의 위치나 건물의 각도 모습이 좀 전과 다르다. 그래서 알았다. 노틀담이 강가가 아닌 강 가운데 있는 시테섬 언덕위에 세워진 거고, 유람선이 그 섬을 끼고 도는 바람에 생긴 착상인 걸. 역시 모파상의 항변은 단연코 타당했다. 배를 타고 도는 내내 어느 지점에서도, 배경엔 어김없이 에펠탑의 거한 자태가 떡 버티고 있으니까.
영화 ‘사브리나
’에서, 오드리 헵번이 ‘파리는 내게 늘 굿 아이디어!’라고 했지만, 나 역시 파리라는 이름만으로도 가슴이 설레곤 했지만, 와보니 낭만의 도시답게 고혹적이다. 더구나 내겐 ‘한 여름에 내리는 눈’처럼 상상도 못했던 일인 터. 완전 넋이 나갔다. 세느강과 파리의 야경에 취해, 로맨틱한 감상에 젖어, 한 장면도 소홀히 지나치기 아깝다. 도대체 어느 쪽이 덜 손해 보는 비경일지, 이리 보고 저리 보느라 고개만 바쁘다. 어느 순간 차라리 하늘을 봤다. 내가 별을 보는 게 아니라, 별들이 나를 지그시 주시하고 있었다. 너무 행복해서, 이런 시간을 선사해준 애들이 너무 고마워서, 목이 다 메어왔다. 매서운 강바람에 다들 선실로 피신했지만, 덜덜 떨며 홀로 갑판에서 바람과 마주했던 이유다. 용혜원님의 <삶의 아름다운 장면 하나>시가 불현듯 떠올랐다. 그대는/기억하고 싶고/소중히 간직하고 싶고/누구에게나 이야기 하고 싶은// 삶의 아름다운 장면 하나/간직하고 있습니까//그 그리움 때문에/삶을 더 아름답게 살아가고 싶은/용기가 나고/힘이 생기는//삶의 아름다운 장면 하나 간직하고 있습니까.
다음날 아침, 세계 3대 박물관 중 방문객 숫자상으론 으뜸이라는 루브르로 갔다. 35만점의 다양한 컬렉션을 보려는 게 아니라 ‘상종가’조차 매길 수 없는 모나리자와 밀로의 비너스 때문이 아닐까. 위엄스런 두 건물 사이에, 나폴레옹 홀의 입구라는 피라미드형 유리삼각건물 ‘피사쥬 라슬리’가 햇빛을 되쏘아 새파랗게 눈이 부시다. 그러나 세상에 존재
하는 모든 것은, 적절한 장소에 배치돼야 생명력을 얻고 아름다움과 빛을 발하는 법. 외양 하나만 보면 분명 참신하고 개성만점형상이지만 자리를 잘못 잡았다. ‘뜬금없이 온실을 왜 고적건물 사이에다 지었지’ 못마땅하게 생각했으니까. 만약 이 건물이 툭 터진 야외 들이나 초록 구릉 위에 서 있으면 기가 막힌 히트작품 감인데...
어느 회랑인가. 웅성웅성 분위기가 틀리고 사람들이 한 곳에 구름처럼 몰려있다. ‘아! 모나리자구나!’ 이미 들었던 대로, 그림이 작아서, 또 그 그림 앞에만 운집한 인파들이 놀랍다. 가까스로 두 번째 줄까지만 진출해 살짝 일별하곤 급히 일행에 합류했지만 영 아쉽다. 그토록 숭모해오던 그림을 ‘먼발치 인사’만으로 작별할 수는 정녕 없는 거였다. 성에게만 귀띔 하곤 뛰다시피 두 회랑을 되돌아가 맨 앞줄, 접근금지라인까지 파고들어갔다. 모나리자와 독대하니, 실제 인물처럼 다가온다. 지그시 그윽한 눈과 미소를 한참 교류하니, 온 몸에 따사함이 밀려온다. 사진 등을 통한 교감과는 천지차이다.
밀로의 비너스도 원래가 팔이 없게 조각된 거로 알았는데, 아깝게도 왼팔이 잘라진 채 발견됐단다. 8등신의 모범처럼 하얀 대리석신체가 진짜 ‘황금비율’인데 너무 순수하고 우아하다. 그 무렵의 여신들 조각엔 사과가 들려있는데 비너스에만 없다는 설명에, 실제 그런가하고 다시 뒤돌아봤다. 과연 다들 사과가 있는데 비너스 손에만 없다. 모나리자가 눈썹이 없어서, 비너스도 사과를 갖지 못해서 더 유명한가? 뭐든지 다 가진 것 보다 조금 못 가진 게 더 낫다는 의미?
그렇구나! 파리에서 모나리자와 비너스를 보면 그것만으로도 방문목적의 반을 이룬 셈이라지만, 모네와 밀레의 그림이 전시된 오르세이박물관을 못 들려 내내 유감이다. 자고로 못 가본 길이 더 아름다운 법인데...
제일 오래된 리용 기차역으로 갔다. 리용은 파리 다음으로 큰 도시고, 아! ‘어린왕자’의 저자 생텍쥐페리의 고향이다. 역사를 둘러보니 시속이 보통 200Km라는 테제베들이 위용을 뽐내고 있다. 저 기차에 앉아 유럽의 전원풍정을 달려보길 소원했기에 감회가 정말 남다르다. 이번엔 화장실에서도 익숙하게 단추를 밟아 손을 씻고 세련된 미소로 나왔다. 모두 똑똑해졌다며 어깨를 으쓱하고 눈을 찡끗대며 “호호호”다. 그렇게 만나기를 학수고대하던 프랑스와는, 아쉽게도 기차 안에서 어설피 헤어졌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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