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런던 편> 뭐니 뭐니 해도 런던에서 제일로 보고 싶었던 건 워털루다리다. 내가 좋아하는 모네가 그린, 안개와 빛에 따라 변화하는 다리의 몽환적인 그림에 반해서다. 또 영화 ‘애수
’때문이다. 워털루다리에서 사랑을 만났고 잃었던, 중년의 Roy<로버트 테일러>가 프랑스전선으로 떠나는 길에 들렸던 다리. 사랑했던 비련의 여인 Myra<비비안 리>의 마스코트였던 럭키 참을 만지작거리며 서있던 애잔한 분위기의 다리. 마이라가 그 럭키 참을 로이에게 주며 앞으로 나를 기억하겠느냐 물었을 때, 남은 생이 다할 때까지 기억하겠노라고 답했던 대화를 회상하던, 안개 자욱한 애상의 다리. 백 뮤직으로 울리던 올드 랭 사인...
그런데 지금 보이는 다리는 안개조차 없이 무심할 만치 소박하고 평범해 환상이 무너진다. 그래도 12월 31일은 ‘연인의 다리’로 차는 통행금지라니 조금 위로가 된다. 강 이쪽으로 커다란 자전거바퀴 같은 게 드높게 서있는데, 척 보는 순간 눈에 가시처럼 거슬린다. 전체와 어울리는 조화의 아름다움이 진정한 아름다움일진대, 주변의 고풍스런 풍정과 따로 논다. 임시로 세웠다가 철거하는 놀이동산을 왜 하필 저곳에 설치허가를 내줘 비경을 해치나 의아했다. 알고 보니 에펠탑을 자랑하는 파리에 샘나서, 2000년에 세운 관측바퀴인 ‘런던
아이’로 일명 Millennium Wheel이란다. 세계 최대의 관람차로 일테면 비행기 같은 놀이기구에 타고 런던시내를 관망하는 거였다. 명물은커녕 혼자 툭 튀어 완전 미운 오리새끼다. 혹 수많은 세월이 흐른 뒤엔 백조가 될지는 그 누구도 모르지만.
화장실이 대게 유료라 공짜화장실을 쓸 겸 시청으로 가란다. 관공서니 의례 평범한 빌딩이겠지 하며 걸어갔다. 앞에 타원형의 거창한 건물이 약간 기울어져서 삐죽 솟구쳤다. 계란이나 통통한 오이를 살짝 기울여 세운 듯, 총알인 듯, 개성만점의 건축이다. 그게 바로 런던에서 가장 현대적인 시청건물이란다. 2004년 완공됐다니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유리와 강철로 된 41층 구조물이다. 표면적을 줄이고 태양전지패널로 열에너지를 효율적으로 유도한 최신식 건축물이다. 푸른 유리가 햇빛에 반사돼 우주의 건물처럼 이색적이다. 지하에 있는 화장실도 소라고둥처럼 빙글빙글 돌아 내려갔다. 주변도로도 벽돌을 깔아 품위를 살렸고, 옆의 소광장과 계단엔 힙합 추종자 같은 젊은 애들이 진을 치고 있다. 때론 야외 콘서트나 예술 공연이 열린다더니 그래 선가. 이렇게 자유와 전통, 개성이 조화된 도시가 런던이었다.
주마간산으로 시내관광을 얼추 끝내니 어느새 밤이다. 식당 근처에 작은 극장들이 몰려있고 네온사인이 번쩍인다. 아기자기하면서 은근히 화려한 분위기가 얼핏 명동을 상기시킨다. ‘이태리에 가면 오페라요, 영국에 오면 뮤지컬을 봐야한다’고 할만치 뮤지컬은 독보적이란다. 화려한 스펙터클이 무기인 뉴욕브로드웨이 뮤지컬에 비해, 역사와 예술의 경지가 깊고 장인정신이 돋보여서란다. 나로선 예술의 거리 분위기를 맛본 것만으로도 위안이다. 하루를 꼬박 잠 안자고 버틴 데다 관광노역>에 지친 터. 매운탕이 입맛과 기를 살려준다.
누가 한국인 아니랄까봐.
새로운 경험으로 가슴이 터질 것만 같던 하루. 녹록치 않은 잡다한 일상사는 싹 잊은, 진정 코 ‘행복한 하루’였다. ‘지나간 것은 더 큰 그리움으로 다가온다’고 푸쉬긴이 말했다. 이 다음엔 오늘 이 하루가 얼마나 더 그리워질까. 문득 이해인 님의 시<어떤 결심>의 마지막 절이 스친다. ... /내게 주어진 하루만이/ 전 생애라고 생각하니/ 저 만치서 행복이 웃으며 걸어왔다.
백을 끌며 호텔에 들어설 때였다. 꿈도 안 꿨던 이역만리 영국에서의 첫날밤! 뭉클 감동이 하늘만큼 밀려와 달과 별들에게 ‘어찌 내게 이런 일이!’하는 순간, 뭔가에 ‘쾅’ 부딪치면서 보기 좋게 나뒹굴었다. 입구에 세워진 쇠말뚝이 정신 차리라며 딴죽을 걸었던 것이다. 하늘 먼 곳, 꿈처럼 빛나는 별들을 보며 딴전하다 그랬기에, 눈물이 쏙 빠지게 아팠지만 창피해 아픈 내색도 못했다. 오늘은 밤까지 ‘어찌 내게 이런 일이’의 연속이다.
호텔에서 영국의 실상을 더 배웠다. 우린 5명이 한조라 3명과 2명 단위로 방을 배정받는다. 유랑 함께 박과 성이 묵게 될 방부터 구경했다. 그런 다음 우리 방의 열쇠를 가진 이랑 합류하려고, 엘리베이터<여기선 Lift>에서 로비인 1층을 눌렀다. 그런데 로비가 안 나와 다시 타고 지하실로 여겼던 0을 누르니 로비다. 영국은 1층을 G나 0으로 칭하는데서 발생한 착오였다. 방에선 전등스위치를 올려도 불이 안 들어오더니 반대로 내리니까 들어왔다. 수도꼭지 트는 법까지 반대였다. 모든 건 다녀보며 직접 부딪쳐야 터득되게 마련이다. 영국의 숙박업소들은 춥다더니 과연 실내공기가 차갑다. 여행지에서의 첫 밤인데도 수다는커녕 꿈나라로 직행이다. 강행군의 여행은 우리 나이에 좀 무리다 싶지만, 더 힘들어지기 전에 온 게 천만다행이라는 의견의 일치만 보고는.
다음날, 5시 30분에 집합하여, 영국, 프랑스, 벨기에 3국이 공동 개발한 유로스타를 타러 팬크라스역으로 갔다. 미들랜드철도호텔이었다는 역사가 고풍스러워 유적 같다. 한때 철거대상에 올랐지만, 빅토리아풍의 담백한 외관과 인상적인 시계탑은 살리고, 내부는 첨단시설로 재무장시킨 건물이다. 런던은 이렇게 개발과 보존이라는 팽팽한 줄다리기를 세련되게 극복한 특유함이 공존하는 도시다. 개발이란 명제아래, 자연이건 건물이건 깡그리 부수거나 팍 밀어버리기부터 하는 한국의 도시정책과 비유된다.
안에 들어서니 쇼핑아케이드 같고 깨끗하다. 안내 말이 불어로 나오고 여권검사까지 하니까 프랑스로 간다는 게 실감난다. 의자에 앉아 우유와 시리얼 햄버거가 있는 도시락을 먹었는데, 이 넓은 공공장소에 쓰레기통이 한 개도 없다. 한국사람 흉잡힐까봐 여기저기 널려진 쓰레기들을 차곡차곡 포개서 한 구석에 쌓아놓을 밖에 없다. 조금 있으니 청소담당여자인지, 검은 쓰레기 백에다 담아간다. 쓰레기통이 미관상 안 좋고 악취문제로 아예 설치를 안했나? 나로선 정확한 정황은 알 길이 없지만, 한국인들 욕 안 먹었기만 바랄뿐이다. 40분쯤 지났나. 승강기를 타고 올라가니 몸피가 날렵하고 멋진 유로스타기차들이 쭉 도열해있다. 기차 칸 사이엔 짐 싣는 공간과 선반까지 있어 편리하다. 명색이 해외왕래기차니 승객들 짐 부피가 큰 걸 감안한 설비겠다. 인제 초고속열차는 시속 186마일로 3시간을 무정차로 달려, 293마일 떨어진 낭만의 도시 파리로 데려갈 것이다.
창밖엔 방금 떠오른 해 옆에 그믐달이 아직도 있다. 그래도 못 다한 미련 때문인지 창백하고 하얀 얼굴의 무력한 모습이다. 딱 내 모양이다. 여명이 차차 벗겨지자, 산이 없는 영국의 전형적인 들판이 모습을 드러낸다. 드넓은 구릉엔 부지런한 양떼들이 새벽산책중이다. 푸른 초록의 식물군들이 농작물인지 목초인지도 가늠 안될 만큼, 내 생전 타봤던 기차 중 최고로 빠르다. 이렇게 전원풍경을 끼고 달리다가 해저터널로 돌진하는 거겠다. 파리의 화장실도 유료니 하차 전 필수코스가 화장실이다. 어딜 가나 사람은 먹는 것과 비우는 것이 급선무고 관건이다 생각하며 손을 씻으려는데, 수도꼭지에 손잡이가 없다. 고장인가 봤더니 애초에 안 달려있는 거다. 세면대 옆과 밑을 살피고 더듬어도 없다. 스위치로 돼있나 하고 벽을 보니 구두닦이 선전마냥 웬 구두그림만 있다. 께름한 채 촌닭표정이 돼서 나왔는데, 이도 손을 못 씻었단다.
박이 얘기를 듣더니 막 웃으며 말했다. 몇 년 전 유로스타를 처음 탔을 때 로버트<남편>가 가르쳐줘 알았다며, 바닥에 있는 동그란 검은 단추를 밟으란다. 다시 가서 그렇게 해보니 물이 쏴아 나왔다. 그제야 구두그림 밑에 그려진 까만 단추가 눈에 확 들어온다. 애들도 알아볼 그 쉬운 동작그림이 아깐 왜 해독불가였을까. 고정관념에 천착해 구두그림을 그냥 힐끗 지나쳐서겠다. 소소한 것들의 다른 점과 자꾸 부딪치자, 모든 것에 익숙한 미국여행 때가 마음 편했다는 점이 인지된다. 그렇게 나는 생전 처음 밟아본 영국 땅과 작별했다. <계속>
*가이드님 말씀과 이석, 전원경 지음<영국. 바꾸지 않아도 행복한 나라>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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