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4월 버지니아텍 총기난사사건이 발생한 이틀 뒤 뉴욕타임스엔 영국의 저명 교육재단 회장 피터 램플경의 편지가 실렸다 : “1996년 3월13일 더블린의 초등학교에서 16명의 어린이들과 교사가 한 괴한이 3분 동안 난사한 총격에 숨졌습니다. 그 범인의 총기소유는 합법적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끔찍한 학살극은 과감한 변화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참극으로 자녀를 잃은 두 명의 아버지가 중심이 된 권총소지금지 캠페인에 나는 자금지원을 약속했습니다. 캠페인은 대성공을 거두었습니다. 영국에서 개인의 권총소지를 금지하는 새로운 법을 입법화시켰으니까요. 난 미국에서도 버지니아텍의 충격과 공포가 과감한 변화의 계기가 되리라고 믿습니다”
램플경 등의 믿음이 실현시킨 변화는 끔찍한 참사를 겪은 후 선진사회가 취하는 정상적인 대응일 것이다.
미국에선 버지니아텍 이후 지난 5년 5만여명이 총격으로 사망했다. 그 전과 다름없이 매일 하루 30여명씩 총에 맞아 숨진 것이다. 아마 내일도, 모레도…내년에도, 후년에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2012년 4월 미주한인사회는 다시 버지니아텍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 2일 북가주 오클랜드 오이코스대학 강의실에서 무차별 총기난사로 7명 사망·3명 부상의 학살극을 벌인 고수남에게서 조승희의 망령을 보며 전율한다.
우울증 약까지 복용하며 자주 섬뜩한 정신질환의 증상을 보였던 23세 대학생 조승희와 이혼과 경제적 어려움, 동생과 어머니의 잇단 사망, 왕따와 퇴학 등 겹치는 개인적 불행에 짓눌리기 전에는 그저 평범했을법한 43세 아저씨 고수남의 내면은 어쩌면 아주 다를 지도 모른다. 알 수 있는 것은 겉으로 드러난 사실 뿐이다. 내적 망상 탓이든 외적 환경 탓이든 탈출구를 못 찾은 그들의 뒤틀린 분노가 ‘합법적으로’ 손에 쥔 총을 통해 폭발한 것이다. 둘 모두에게 훨씬 더 필요했을 정신건강 서비스를 받기보다는 총을 구입하기가 오히려 쉬운 것이 그때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은 미국의 현실이다.
총기논쟁의 핵심은 공공안전과 개인자유의 대립이다. 두 가지 다 민주사회를 지탱하는 기본 요소이지만 그 균형 잡기가 미국에선 말처럼 쉽지 않다.
미국의 총기규제는 1968년 마틴 루터 킹 목사와 대선후보 로버트 케네디가 잇달아 총격 암살당한 후 제정된 연방법으로 본격 강화되었다.
그러나 1994년 클린턴 대통령이 밀어붙인 ‘공격용 무기판매 금지법’ 통과가 그해 중간선거 민주당 참패의 원인 중 하나로 드러나면서 정치적 시계추는 반대방향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2000년 부시의 대선 승리도 앨 고어의 ‘총기반대’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다. 10년 한시법이었던 94년의 총기규제법은 의회의 연장거부로 폐기되었고 총기관련 업자에게 사고나 범죄에 대한 책임 묻는 소송금지법이 통과되기도 했다.
2005년 버지니아텍 참사와 2011년 애리조나 투산에서 연방 하원의원 가브리엘 기퍼즈를 쓰러트린 난사사건이후 전국적 충격이 잠시 총기규제법을 추진시키는 듯 했으나 모두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그 배경엔 400만 회원과 풍부한 자금을 무기로 워싱턴을 주무르는 전미총기협회(NRA)의 막강한 정치 파워가 버티고 있다. NRA와 등지고 싶지 않은 공화당은 물론 민주당 정치인들에게도 총기규제는 될수록 기피하는 이슈이며 2008년 오바마가 내걸었던 총기규제 공약들도 아직 실현되지 못했다.
규제는커녕 2008년과 2010년 두 차례에 걸친 연방대법원의 수정헌법 2조에 의거한 개인권총소지 합헌 판결이후 여러 주에서 총기판매 확대 및 공공장소 총기휴대 허용 법안들이 활발하게 추진되고 있다.
미국인들의 총기사랑이 집착을 넘어 중독으로 들어서는 것일까. 총기규제 지지여론도 계속 낮아지는 추세다. 갤럽조사에 의하면 1990년 78%에서 95년 62%, 2007년 51%로 떨어지더니 2010년엔 44%, 과반수 이하로 내려앉았다. 논쟁조차 시들해지고 있다.
총기옹호론자들의 목청은 갈수록 높아진다 : “총이 사람을 죽이지 않는다. 사람이 사람을 죽인다” 그러나 총을 가진 사람은 순식간에 수많은 사람들을 손쉽게 죽일 수 있다. 총이 사람을 성능 강한 집단학살자로 만들고 있는 것이다.
만약 총을 살 수 없었더라면 고수남은 7명의 학생들을 죽이지 못했을 것이다. 새벽부터 공부하고 일하며 소아과 의사가 되겠다던 21세 착한 딸의 빛나는 꿈은 허무하게 꺾이지 않았을 것이다. 4살짜리 어린 아들을 키우면서 대가족을 뒷바라지하던 24세 젊은 엄마도, 밤에는 공항 청소부로 일하며 간호학을 공부하던 30대 인도청년도 지금 모두 아메리칸 드림을 향해 열심히 살고 있을 것이다.
2년 전 연방대법원이 시카고의 권총소지금지법을 위헌판결로 무효화시켰을 때 당시 리처드 데일리 시장이 개탄했다 : “대법관들은 총기폭력의 현실을 인식하지 못하는 듯싶다…도대체 얼마나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야 알겠는가?”
엊그제 오이코스 희생자 추모기도회에서 진 콴 오클랜드 시장도 말했다 : “이제 우리는 총기소유에 대해 되물어야 한다. 지금은 미국이 스스로의 영혼을 들여다보아야 할 때다”
무분별한 총기 남용으로 희생자뿐 아니라 가해자도 급증하고 있는 한인사회에게도 지금은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할 때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최선의 대응책인 총기규제 강화를 위한 미국 사회 노력에 적극 동참해야 할 때다. 이미 5년 전에 시작했어야 했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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