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여름, 민주당 대선 경선에 뛰어든 버락 오바마 진영은 벽에 부딪쳐 있었다. 아직 후보로서의 이미지도 정립 못한 채 여론조사에서 라이벌 힐러리 클린턴에게 크게 뒤지고 있던 그때, 캠페인 매니저 데이빗 플루프는 한 제안서를 받았다. 경선이 초기에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가정 하에 세워진‘ 대의원 작전’- 후에 오바마 진영의‘ 비밀병기’로 불렸던 대의원 디렉터 제프 버먼이 작성한 대의원 확보
전략설명서였다.
워싱턴포스트가 지난 주말 미 대선정치의 교과서로 삼을만하다고 소개한‘ 매직 넘버’는 오바마 대의원 작전의 인사이드 스토리를 담은 버먼의 신간이다. 버먼은 경선에서 승리하려면 일찍부터 두 가지 확보 작전을 동시에 전개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하나는 승세를 장악하는 익사이팅한 ‘모멘텀’이고 다른 하나는 숫자로 차근차근 쌓아가는‘ 대의원’이다.
당시 힐러리는 초반 승리에 집중해 상대의 자금을 고갈시켜 제풀에 쓰러지게 하는 재래식 작전을 구사한 반면 오바마는 대의원 확보를 집중 공략했다.
대의원 확보는 단순한 숫자 계산이 아니다. 먼저 경선 규정을 자세히 알아야한다. 1968년의 유혈폭동 전당대회 이후 여러 차례 개정을
거듭해온 민주당의 경선규정은 변호사나 이해할 수 있을까, 까다롭기 짝이 없다.
이 분야에 ‘빠삭’했던 변호사 버먼에 의하면 복잡한 규정에 대한 정확한 파악은 시작에 불과하다. 전국 각 주, 각 선거구 별로 지역특성 분석에 따라 그 규정들을 적용해가는 정치적 두뇌가 있어야 한다. 오바마 팀은 대형 주의 프라이머리 못지않게 작은 주의 코커스를 집중 공략하여 힐러리와의 대의원 숫자싸움에서 리드를 지켜갔고 경선이 끝난 주에서도 단 1명 수퍼 대의원의 지지를 더 확보하기 위해 끈질긴 설득을 멈추지 않았다.
애매모호한 규정을 필요할 때 마다 오바마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해 밀어붙이는 능력도 발휘했다. 미시간과 플로리다 경선 무효화가 대표적 성공의 예였다. 당시 2개주는 민주당 규정을 어기고 경선일정을 1월로 앞당겼다. 오바마팀은 이 규정을 끝까지 물고 늘어져 2개주의 투표결과를 무효화시켰다. 플로리다 표가 유효로 계산되었더라면 오바마의 승리는 그때 물 건너갔을 지도 모른다.
금년 공화당의 ‘매직 넘버’는 ‘1,144’ 다. 재선에 나선 민주당의 오바마 대통령과 대결할 공화당 대선 후보로 지명되기위해 확보해야
할 대의원 숫자다.
한 후보가 매직 넘버에 도달하면 사실상의 경선은 끝나고 당 후보가 확정된다. 지난 30여년 공화당은 비교적 초기에 경선을 마무리했다.
4년전 매케인을 비롯, 밥 도울과 부시 부자 모두 3-4월 전에 매직 넘버 확보에 성공했었다.
그런데 금년 공화경선은 빨라야 5월말, 아니면 마지막 유타에서 프라이머리가 실시될 6월 26일까지 이어지는 장기전이 될 것으로 예상된다. 아예 8월말 플로리다 탬파에서 열릴 전당대회 때 후보를 선출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좀체 공화 표심을 장악 못하는‘ 허약한 선두주자’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미트 롬니 탓이라기보다는 바뀐 두 가지 선거환경 - 공
화경선규정 개정과 수퍼팩의 등장 때문이다.
종래엔 경선초반에서 부진한 후보는 자금이 고갈되어 포기할 수밖에 없었지만 금년부터는 마르지 않는 샘물 같은 ‘큰손’ 수퍼팩이
선거전에 가세하고 있다. 그들이 거액의 광고비를 계속 지원하는 한 하위권 후보도 중도하차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2008년 탐탁찮은 중도파 존 매케인을 일찌감치 후보로 결정지은 공화당은 민주당 오바마-힐러리의 치열한 경선 열기를 상당히 부러워했다. 대부분 승자독식으로 비교적 단순했던 공화당의 대선 경선규정은 그래서 2010년 회의를 통해 득표율에 따라 대의원을 배분하는 방식으로 개정되었다. 패자에게까지 대의원을 나눠주어 선두주자도 매직 넘버에 쉽게 도달할 수 없으니 경선이 장기화되는 것은 당연하다.
롬니 뿐 아니라 릭 샌토럼과 뉴트 깅리치, 론폴까지 제각기 승리를 선언한 이번 주 ‘수퍼 화요일’의 경선 결과, 두 가지는 확실해 졌다.
첫째, 여전히 보수진영의 지지를 얻지 못하고 근로계층 보통사람들과의 소통 문제를 극복하진 못했으나 대의원 확보에선 롬니가 압도적
선두주자다. 각 주마다, 선거구마다 복잡하고 애매한 배분규정으로 인해 집계현황이 언론사마다 다르긴 하지만 AP통신에 따른 후보별 확
보 대의원수는 7일 현재 롬니가 415명으로 샌토럼의 176명, 깅리치의 105명, 폴의 47명을 다 합친 숫자보다 많다. 3월말부터 4월에 접어들면서는 일리노이와 뉴욕, 메릴랜드, 위스컨신 등 샌토럼보다는 롬니에게 유리한 경선들이 기다리고 있으니 역전의 가능성은 희박하다.
그러나 둘째, 당분간 아무도 중도하차하지 않을 것이다.‘ 내용상의 승리’를 주장하는 샌토럼과 조지아 승리를 발판으로 다음 주 남부
정복을 벼르는 깅리치, 전당대회까지 메시지 전파 완주를 다짐해온 폴 까지 나름대로 내세울 명분이 있고 제각기의 수퍼팩을 등에 업었
으니 거칠 게 없다.
선거가 장기화될수록 중요해지는 것이 대의원 싸움이다. 이미 숫자 계산상으로 다른 후보가 롬니를 뛰어넘기는 거의 불가능해졌다. 그런데도 공화당 표밭엔 아직도‘ 반 롬니’ 정서가 생생하다…깅리치의 표현대로 ‘토끼와 거북이의 경주’가 되든, 거북이들의 마라톤이 되
든‘, 매직 넘버’를 향한 고된 행군은 그래서 한참 더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박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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