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보 두다멜의‘말러 프로젝트’가 대장정을 마쳤다. LA 필하모닉과 베네수엘라의 시몬 볼리바 오케스트라, 10명의 솔로 성악가와 연인원 1,000여명의 합창단이 동원된 이 프로젝트는 LA필 역사상 최대 규모의 공연이자 세계 음악계의 관심을 집중시킨 이벤트였다. 1월13일부터 2월5일까지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의 9개 교향곡이 숨 돌릴 틈도 없이 연주됐다.
24일간 17회의 콘서트가 열렸으니 얼마나 바쁜 일정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짧은 기간에 휘몰아친 말러 전곡 사이클은 유례없는 일이며, 말러리안들에겐 어쩌면 생애 단 한번뿐일 화려한 축제였다.
말러에 푹 빠져 지냈던 지난 3주는 너무도 행복했다. 거의 하루 걸러 디즈니 콘서트홀로 달려가는 일은 고됐지만 마음은 벅차고 터질 것만 같았다. 말러의 음악이 주는 감정적 진동이 얼마나 크고 여운이 길던지, 매번 채 삭이고 소화할 틈도 없이 다음 곡을 들어야 하는 안타까움은 말로 다 할 수 없었다.
듣는 사람이 그랬으니 정작 2개 오케스트라를 지휘하며 프로젝트 전체를 끌고 간 두다멜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얼마나 힘들었을지 상상도 못하겠다. 하나 같이 길고 어렵고 무거운 9개 심포니를 신들린 듯 소화해 내는 그를 보면서 말러가 1번에 이름 붙인 ‘거인’ 혹은 ‘초인’이 바로 두다멜이라는 생각마저 들었다.
연주에 참가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론 두다멜은 나중에 팔을 들어 올리지도 못할 만큼 녹초가 된 상태에서 강행군했다고 한다. 리허설 포함 70여회를 지휘했다니 안 그러면 이상할 것이다. 젊어서 할 수 있는 일이고(그는 이번 프로젝트 도중 31세 생일을 맞았다), 시몬 볼리바 오케스트라를 데려온 것도 젊은 스피릿과 에너지와 파워가 필요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20~30대 젊은이들로 구성된 시몬 볼리바 오케스트라는 아주 젊고 강건한 소리를 냈다. 무려 175명에 달하는 단원들이 오케스트라 피트를 빼곡히 채우고 앉아서 대형 관현악 편성이 요구되는 말러 심포니를 빵빵 울려댔다. 패기에 가득 찬 베네수엘라 청년들이 일사불란하게 만들어내는 현과 금관 소리는 가슴이 뻥 뚫리고 머리가 흔들릴 정도로 대단했다. 더구나 1999년부터 ‘엘 시스테마’(베네수엘라의 저소득층 청소년 음악교육 시스템)에서 두다멜과 함께 자라온 아이들이라 기가 막힌 호흡을 자랑했으며 두다멜의 손짓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
말러 사이클은 원래 연주자들에게도 대단한 도전이다. 인터미션 없이 최장 1시간반이 넘는 말러 심포니들은 감정적으로나 영적으로 연주자들을 소진시키기 때문에 엄청난 긴장감과 에너지가 필요한 작업이라고들 한다. 그러나 LA필과 시몬 볼리바 두 오케스트라는 더 이상 기대할 수 없으리만치 훌륭한 연주를 선사했다. 사실 이런 공연에선 기술적으로 잘하고 못 하고는 별로 카운트 되지 않는다. 오로지 말러의 혼과 열정이 느껴지는 연주만으로 청중은 말러화되게 마련이니까.
전 콘서트가 완전히 매진됐던 말러 사이클에서 청중석은 그야말로 매번 열광의 도가니였다. 브라보, 앙코르, 휘파람과 환호성, 기립박수가 끝없이 이어진 것은 당연하고, 거의 모든 연주에서 악장 사이에 마구 박수가 쏟아져 나올 정도로(사실은 몹시 거슬렸다) 처음부터 흥분들을 해서 난리를 쳤다. 가장 인기 있는 5번 연주가 끝났을 때는 모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발까지 굴러대며 환호를 보냈다.
전곡 연주를 들었다고 하니 9개 교향곡 중 어떤 게 가장 좋았냐고 묻는 사람들이 많다. 우열을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다 황홀했지만 특별히 1번과 2번, 6번, 9번이 좋았다. 1번은 과거 두다멜 지휘로 이미 두 번을 들은 바 있는데도 이번 연주는 분위기가 크게 다른, 정말 깊이 무르익은 아름다운 연주였다.
2번을 듣고 인생이 바뀌었다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 이유를 이번에 알게 됐다. 그동안 CD로 수없이 들었으나 라이브 오케스트라 연주를 들으니 완전히 다른 곡이었다. 이래서 사람들이 2번을 듣고 말러에 빠지는구나, 확인할 수 있었다. 어디서든 2번 콘서트가 열리면 꼭 가서 들어보라고 권하고 싶다.
노래와 합창이 들어가는 3번과 4번은 장대하고 다채롭고 서사적인 분위기, 젊은 말러의 방황이 느껴지기 때문에 한번 들으면 잊을 수 없는 인상을 남긴다. 5번은 유명한 아다지에토 악장 때문에 흔히 ‘죽음’을 연상시키는 곡이지만 두다멜은 밝고 힘차게 그려냄으로써 작곡가의 의도를 살린 점이 만족스러웠다. 말러가 최전성기 때 인생의 기쁨과 사랑을 담아 작곡한 곡임에도 불구하고 영화 ‘베니스의 죽음’과 로버트 케네디의 장례식에 사용됨으로써 슬프고 어두운 곡으로만 인식돼 왔다.
6번 ‘비극적’에 대해서는 이 교향곡을 좀 아는 사람들을 위해 언급하자면 두다멜은 1악장 다음에 스케르초보다 안단테 악장을 먼저 연주했다. 그리고 유명한 해머 타격도 두 번으로 마쳤다. 말러는 마지막 리허설 순간까지 두 악장의 순서를 결정하지 못했고 해머 타격도 세 번째는 나중에 지우는 등 많은 고민을 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만큼 훗날 지휘자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분위기가 많이 달라지게 되는데 두다멜은 암울하고 절망적인 분위기보다는 아름다운 절대 음악적 표현을 선택한 것 같다.
7번 ‘밤의 음악’은 잘 연주되지 않는 곡이지만 이번에 썩 좋은 연주를 들었으며, 말러가 죽음을 앞두고 쓴 9번은 세상과 작별하는 고요한 선율이 가슴을 깊이 흔들면서 피날레를 장식했다.
하이라이트는 두말 할 것 없이 4일 슈라인 오디토리엄에서 있었던 8번이었다. 1910년 말러가 뮌헨에서 초연할 때 무대에 1,020명이 올랐던 데서 ‘천인교향곡’이란 별명이 붙여진(말러는 무척 싫어했지만) 작품으로, LA에서는 처음으로 1,017명의 공연기록을 세웠다. 오케스트라만 거의 200명에 달했고, 16개 합창단에서 모인 800여명의 코러스 중에는 125명의 어린이들도 포함됐다. 아쉬웠던 것은 슈라인 오디토리엄의 불우한 음향효과로, 그 장대한 사운드가 충분히 발현되지 못한 안타까움이 있었다.
이건 좀 약 올리는 소리 같아서 망설임 끝에 덧붙이는데 말러의 음악은 반드시 실황연주로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모든 음악이 그렇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비웃음을 살 정도로 다양한 타악기를 많이 사용하고, 거대한 오케스트라 편성에 엄청난 굉음이 터지는가 하면 거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가 깔리기도 하고, 먼 효과음을 위해 무대 뒤에서 혼이 연주되는 등의 소리들은 녹음으로는 도저히 그 폭넓고 섬세한 다이내믹이 살아날 수 없다는 점을 이번에 절실히 느꼈다. 항상 느끼는 것인데 음악은 들리는 것이지만, 보이기도 하고 만져지기도 한다. 최소한 연주실황을 담은 DVD로 감상하는 것이 말러 음악에 대한 예의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콘서트 전 열리는 강의도 3회 들었다. 2번 ‘부활’의 아마추어 지휘자에서 세계적인 말러 권위자가 된 길버트 캐플란, 말러 전문가로 널리 알려진 음악비평가 노만 레브레히트, 그리고 마릴린 맥코이 교수의 강의는 재미있고 유익했다. 이런 세계적인 말러 전문가들을 직접 만날 수 있었던 것도 이번 프로젝트의 큰 수확이었다. 끝나고 나니 진이 다 빠지고 허탈하지만 뿌듯하고 충만하다. 인생이 한층 아름다워졌다.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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