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정적인 4번, 바리톤 햄슨 열창과 잘 어울려
내달 천인교향곡 등 전곡 연주 기대감 커져
드디어 지난 금요일, 두다멜과 LA 필하모닉(+시몬 볼리바 오케스트라)의‘말러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교향곡 4번과 가곡‘방랑자의 노래’로 막이 오른 말러 사이클은 시작이 너무 좋았다.
솔직히 말하면 그동안 어찌나 기대를 했는지 혹시라도 실망하면 어쩌나, 살짝 긴장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날 두다멜이 포디움에 올라서 지휘봉을 드는 순간 가벼운 전율이 몸을 스치면서 우리는 다 같이 말러 속으로 몰입해 들어갔다.
디즈니 콘서트홀을 가득 메운 청중 모두가 반짝이는 기대와 호기심과 열정으로 조는 사람 하나 없이 진지하게 경청했던, 참 좋은 연주회였다.
4번은 말러 교향곡 중 가장 짧고 고전적이며 서정적이어서 ‘쉽다’고 여겨지는 작품이다. 경쾌한 썰매방울 울리는 소리로 시작되는, 어린이가 본 천국을 그린 이 작품은 낭만주의적 표현이 두드러져서 그 중 부담 없이 감상할 수 있는 말러 심포니다. 아마 그래서 오프닝 레퍼터리가 됐는지도 모르겠다.
두다멜이 지휘한 말러 4번은 디테일이 섬세하고 감정이 충만한 아름다운 연주였다. 지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는, 절제됐으나 결코 억제하지 않는 격정이 곳곳에서 피어올랐다. 들으면서 두다멜은 정말 천재구나, 생각했다.
연주회를 앞두고 레너드 번스타인과 클라우디오 아바도가 지휘하는 4번을 CD와 유튜브로 반복해서 들었는데, 말러 해석의 권위자들로 꼽히는 이 거장들과 비교해서도 두다멜의 4번은 특별하게 아름다웠다.
자기만의 색채가 분명히 있으면서 말러의 의도를 단 한 군데도 놓치지 않으려는 젊은 지휘자의 열정이 그대로 느껴지는 연주였다. 물론 음반을 듣는 것과 라이브 콘서트의 감동을 비교하기는 어렵겠지만.
4번에 앞서 연주된 ‘방랑자의 노래’는 바리톤 토마스 햄슨(Thomas Hampson)의 열창이 돋보이는 무대였다. 햄슨은 수십년 전에 이 4개의 연가곡을 번스타인과 녹음한 바 있는 말러 전문가수로, 그가 깊고 굵은 목소리로 노래하기 시작하자 비로소 말러 축제가 닻을 올리는 기분이었다.
또한 교향곡 4번 4악장에서 소프라노 솔로를 맡은 미아 퍼슨(Miah Persson) 역시 어린이의 순진무구함을 잘 표현한 노래로 이날의 연주를 완벽하게 마무리했다.
‘말러 프로젝트’는 내일부터 19~21일 1번(+미완성 10번 1악장)으로 이어져 다음 주에는 2번(22일), 3번(24일), 5번(26일), 6번(28일), 7번(31일)이 숨 가쁘게 계속된다. 그런 다음 2월4일 대망의 8번 천인교향곡과 함께 마지막 9번(2, 3, 5일)으로 대장정의 막을 내린다.
9개 교향곡 모두가 1시간 넘게 길고 악장의 변화가 심해서 연주자들이나 청중까지도 모두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큰 도전이 될 것이다.
또한 “교향곡은 세계와 같다”고 했던 말러의 말처럼 심포니 하나하나가 인생과도 같고 우주와도 같으며 운명과도 같기 때문에 연주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모두가 감정적이며 영적으로도 소진되는 경험일 수도 있다.
말러 탄생 150주년이던 2010년과 서거 100주년이었던 2011년 전 세계의 수많은 지휘자와 오케스트라가 말러 사이클에 도전했지만 3주라는 짧은 기간에 전곡을 연주하는 일은 두다멜이 처음이다. 뿐만 아니라 두다멜은 전곡을 외워서 암보 지휘하는 기록도 남기게 된다.
두다멜이 이렇게 벅차 보이는 프로젝트에 도전하는 이유는 말러가 오늘날의 그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여러 번 기사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두다멜은 2004년 구스타브 말러 지휘 콩쿠르에서 5번 지휘로 우승하면서 명성을 얻게 됐다.
그때 심사위원이었던 에사 페카 살로넨이 그의 천재성을 알아보고 LA로 초청, 할리웃보울 무대에 데뷔시켰고 그 결과 LA필의 상임지휘자가 되었으며, 취임 콘서트에서 연주한 것도 말러 1번이었다.
두다멜이 얼마전 LA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그와 말러와의 만남은 그보다 훨씬 오래 전 우연히 일어난 ‘실수’에서 비롯됐다.
그는 10세 때 친구에게서 크리스마스 선물로 차이코프스키의 ‘비창’ CD를 받았는데 열어보니 그 안에 말러의 5번 디스크가 들어 있었다고 한다. 아마도 레코드점에서 실수로 바꿔 넣었던가 보다.
“열 살짜리로서는 너무 길고 처음엔 이해하기 어려웠으나 반복해 들으면서 완전히 사랑에 빠져버렸다”는 그는 때마침 집에서 발견한 말러 1번의 트럼본 파트 악보를 보고 혼자 독학으로 트럼본을 배워 연주했을 정도로 이미 그 시절에 말러에 미쳐 있었다(두다멜은 원래 바이얼리니스트고, 아버지가 트럼본 주자였다).
그로부터 6년 후 멘토인 호세 안토니오 아브레우(유명한 ‘엘 시스테마’ 창립자)로부터 정식으로 1번 심포니를 처음 배웠다. “말러를 지휘하려면 모든 것을 알아야 한다”며 오케스트라의 모든 악기 파트를 노래로 외우도록 시킨 아브레우의 교수법은 두다멜에게 말러의 세계로 들어가는 문을 활짝 열어주었고, 그로 인해 지금의 두다멜이 탄생한 것이다.
두다멜은 1번과 2번, 5번, 9번을 여러 차례 연주한 적이 있으나 3번, 4번, 6번, 7번은 최근에야 통달했고, 8번과 10번 아다지오 악장은 이번이 첫 연주라고 한다.
그러니 1,050명의 공연자가 무대에 서는 슈라인 오디토리엄에서의 8번 천인교향곡은 그에게 엄청난 도전이 될 듯하다. LA 공연에 이어 곧바로 베네수엘라 카라카스로 날아가 연주할 8번 콘서트에는 무려 1,600명이 동원된다고 한다.
말러가 확장한 교향곡의 규모를 이처럼 배짱 좋게 키울 수 있는 지휘자도 두다멜 밖에는 없을 것이다. 카라카스에서의 천인교향곡은 2월18일 ‘LA필 라이브’ 프로그램으로 미 전국 영화관을 통해 생중계될 예정이라, 두다멜은 1회 콘서트의 청중을 10만명으로 확장하는 기록도 세우게 될 전망이다.
#다음은 두다멜이 이야기하는 말러 심포니의 감상 포인트.
1번 ‘거인’은 영웅의 죽음이며, 이것은 직접 2번 ‘부활’로 이어진다. 2번의 마지막 악장 합창 피날레는 시스틴 채플을 연상시키는, 천지창조와 거의 맞닿은 곡이다.
3번은 자연을 노래한 교향곡으로서 자연, 동물, 계절, 철학, 인간, 니체, 그리고 천사들과 어린이, 젊음, 사랑 등 모든 것을 이야기하는, 마치 인생에 관한 책을 읽는 듯한 작품이다.
4번은 갑자기 18세기로 돌아간 듯 단순하고 목가적이며 고전적인 작품, 5번은 앞서 말했다시피 그에게 아주 특별한 의미가 있는 아름다운 심포니다.
6번은 “어두컴컴한 영화관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어두우나 우울하지는 않은 심포니, 7번 ‘밤의 노래’는 그가 수년간 공부한 후 최근에서야 지휘하기 시작한 작품으로 거침없는 1악장과 스케르조 악장이 경이로운, 유령이 춤을 추듯 무섭게도 느껴지는 곡이다.
8번은 거대하지만 인간적인 모험이며, 10번은 말러의 가장 추상적인 작품으로 새로운 곳을 찾아가는 미로와도 같다. 9번은 ‘놓아주기’(letting go)다. “또 다른 삶이 아니라 또 다른 단계로의 초월”이라고 두다멜은 풀어내고 있다.
웹사이트를 찾아보니 총 17회 콘서트의 티켓이 완전히 매진된 것은 아니다. 이번 기회에 단 한 곡이라도 두다멜이 지휘하는 말러 사이클에 동참해 보시기를.
www.laphil.com
<정숙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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