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다섯살이던 무렵 아버지는 세상을 뜨셨다. 어머니는 또 내 나이 이십대 중반에 돌아가셨다. 내가 살아오면서 제일 부러웠던 것은 오랫동안 부모님이 살아 계신 친구들을 만날 때였다. 아직도 부모님들이 구십을 넘긴 친구들이 간혹 주변에는 있다. 워낙 어릴때 아버지가 돌아 가셨기 때문에 아버지의 대한 기억들은 아주 단편적인 몇가지 뿐이다.
외출을 하셨던 아버지가 돌아오실때 나는 언덕길을 쏜살같이 달려 내려가 인력거를 타고 돌아오시던 아버지에게 덥석 안기곤 했다. 그럴때마다 아버지는 나를 공중에 높이 들어올리고 파안대소를 하셨다.
거의 육십이 다 된 아버지에게 늦둥이로 태어난 나는 귀여움을 독차지 했다. 그 시절 일본인이 경영하던 유치원에 다녔던 나는 진담 모퉁이로 불리우던 긴 돌담길을 아버지의 손을 잡고 의기양양하게 다니곤 했다. 나는 알록달록한 드레스를 입고 빨간 구두를 신고 앙징스런 앞치마에 달린 주머니에 아버지가 넣어 주신 사탕 하나를 먹으면서 행복했던 유년 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어느날 일본 아이가 내게 한말이 날카로운 가시가 되어 내 가슴을 찌르기 전까지는 말이다. "얘! 너네 할아버지가 교문 앞에서 기다리신다"
그날 나는 아버지를 할아버지로 불렀던 그 계집애가 미웠고, 괘씸했고 이해가 잘 되지 않았지만, 집에 돌아와서 엄마와 아버지를 찬찬히 비교해 보니까 어린 내 눈에도 우리 엄마는 너무 젊었고 아름다웠고 아버지는 너무 늙어 있었다. 이 사건은 내게 엄청난 충격과 함께 처음으로 큰 슬픔을 느끼게 했다. 그 후로 나는 더 이상 아버지가 나를 유치원에 마중 나오지 못하게 했다.
그해 유월에 아버지는 세상을 뜨셨다. 큰 대청 마루에서 하얀 소복을 한 어머니가 삼단 같은 검은 머리를 풀어 헤치시고 길고도 긴 곡을 하셨고, 그 서러운 울음은 유월의 더위 속에 녹아들었다. 그 시절은 대동아 전쟁이라고 불리던 2차 대전의 말기였기 때문에 아버지는 유언을 우리들이 모두 어느 한적한 시골로 이사를 가라고 하셨다. 아버지는 백년도 더 넘은 구십년도 초에 일본 유학생으로 뽑혀 동경제국 대학을 나오신 분이라 인테리셨다. 아버지는 일생을 고급 관리로 계셨고 말년에는 땅을 사서 과수원을 만드시고 자신의 꿈을 이루신 분이다.
어린 시절 내가 살던 집 마당에는 늘 꽃들과 정원수가 넘쳐났다. 아버지를 닮았는지 나도 일생을 아름다운 꽃들과 정원을 사랑했고, 노래나 시, 문학을 좋아하고 그 길을 택했던 것도 아버지의 영향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아버지가 돌아 가신뒤 소개를 갔던, 이제는 이북땅이 된 황해도 연백군 금산면의 농촌과 산과 들과 그때 뛰어 놀던 깨끗한 시냇가, 집뒤의 언덕과 밤이면 청승스레 울던 짐승들의 울음소리들이 들리는 것만 같다. 그 시절 마땅한 군것질이 없어 여름이면 밭에 나가 커다란 오이를 뚝 따서 먹거나 어쩌다가 마름집 아낙이 밤새도록 고아 만들던 달디단 엿을 졸린 눈를 부벼가며 기디리곤 했던 기억도 이제는 그리움으로 남아있다.
복녀라고 불리우던 눈이 크고 가끔 오줌을 싸서 야단을 맞던 마름집 딸도 그 혹독한 세월을 견뎌내고 아직도 그곳에 살고 있을까.
왜 그동안 세월은 그렇게 많이 흘러갔는데, 오십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와 칠십년도 더 전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이맘때 구정이 되면 아직도 가슴 사무치도록 그리운가. 내가 그리워하는 얼굴들 중에는 죽은 자도 있고 산 자도 있다.
지난 몇년동안 고국에 돌아가서 살때, 사귀었던 젊은 엄마들 중에 몇명은 내가 각별히 사랑했고 지금도 어느땐 못견디게 그리운 얼굴들이 있다. 아마 그 이유는 진실한 마음을 서로 나누었기 때문일 것이다. 잠깐을 사귀었어도 진실하고 따뜻한 마음을 나눈 사람들은 오래가도 잊혀지지 않고 그리운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반면 아무리 오래 알던 사이라도 무덤덤하고 별로 생각이 나지 않는 사람들은 진정한 마음을 나누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날 내가 떠나면 우리 아이들도 한때는 저희들의 엄마도 엄마이기 전에 한 어린 아이였고, 또 젊은 여자였고, 가슴 아픈 사랑도 나누던 그냥 평범한 여자였다는 것을 알기는 할까. 그리고 나처럼 항상 그리운 얼굴로 기억할까. 이런 것들은 생각만 해도 가슴이 먹먹해진다.
지금 내 침실 조그만 탁자 위엔 내가 젖먹이였을때 찍은 우리 가족의 가족 사진이 한장 놓여 있다. 근엄한 얼굴을 하신 아버지와 새파랗게 젊은 어머니와 지금 팔십대를 넘기신 큰 언니와 작은 언니와 오빠의 얼굴, 그 사진을 보면 늘 마음이 짠해지고 일생을 못나게만 살아온 오빠 때문에 돌아가실 때까지 마음 아파하시던 엄마의 그 끈끈한 사랑이 생각나 눈물이 나곤 한다.
올 가을에는 친구들끼리 그룹 여행으로 고국을 다녀 올까 계획 중이다. 아직 살아있을때 그리운 얼굴들을 만나고, 못다한 회포도 풀고 후회 없는 인생을 살고 싶다.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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