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이야기 <2>
유민원 총재 민영환은 곧 12월부터 하와이로 이민 가는 사람들에게 ‘해외여권’을 발행하기 시작하였다.
이 여권을 발급받은 사람들은 1902년 12월 22일에 제물포에서 일본 상선 겐카이마루(玄海丸)를 타고 일본의 나가사키로 갔다.
이들은 그 곳에서 1월 2일에 미국 상선 갤릭호를 타고 1903년 1월 13일에 호놀룰루에 도착한 102명의 이민자들이었다.
첫 이민단의 한 사람인 이경도는 1902년 12월 20일에 ‘대한제국 해외여권’ 번호 41호를 발급 받았다. 일본으로 떠나기 2일 전에 받은 여권은 1장의 한지로 한글과 한문 혼용의 원문과 영어 번역문과 불어 번역문이 함께 실려 있다.
이 형식은 당시 일본 여권 형태를 모방한 것이다. 단지 일본 여권은 한지가 아닌 양지였다.
이경도는 경기도 파주 사람으로 31세였고, 결혼을 하였으나 혼자 하와이에 왔는데, 그의 여권이 호놀룰루의 비샵 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유민원에서 여행권을 발행하면서 또한 대한 외부(大韓 外部: 대한제국의 외무부)에서도 여행권을 발행하였다. 1903년 3월에 외부가 김순건에게 발급한 여행권은 ‘해외여권’ 대신에 ‘집조(執照)’라고 불린 1장의 한지였다.
김순건은 황해도 연안 사람으로 1903년 3월 30일에 하와이에 도착하였는데, 29세의 부인 홍 씨와 4살 된 아들 원성, 그리고 1살 된 춘성과 함께 도착하였다.
부인이나 아들의 여권이 따로 있었는지 알 길이 없으며 김순건의 여권에 가족들의 이름이 적혀있지 않다. (사진 #3: 김순건의 집조)
고영휴는 제주도 사람으로 49세의 홀아비였다. 흥미로운 것은 1903년 8월 23일 같은 날에 고영휴가 외부로부터는 ‘집조’와 유민원으로부터는 ‘해외여권’ 을 발급 받아, 9월 21일에 하와이에 도착한 것이다.
국운이 기울어져가는 대한제국의 정부 각 부처 간에 혼선이 있었고, 정부 운영이 원만치 않았음을 알려주는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같은 날 두 가지 여권을 받은 고영휴가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두 개의 증서를 모두 가지고 하와이에 왔다.
집조에는 고영휴의 집이 인천 우각동으로 되어 있는데, 해외여권에는 그의 집이 제주도 성내 1동으로 되어있고, 인천 우각동의 상인(商人) 이여삼(李汝三)이 보증인으로 되어 있다.
이로 미루어 제주도에서 온 고영휴가 인천 우각동 이여삼의 집에 머물고 있다가 하와이로 왔으리라 짐작한다.
이선일의 가족은 1905년 4월 10일에 외부로부터 2개의 집조를 발급 받았다.
유민원이 1903년 말경에 폐쇄 되었고, 외부에서만 집조를 발급하고 있었다.
1개는 이선일 (40세), 처 (이름 없이, 38세), 아들 승필 (17세 반)과 아들 승신 (3세)에게 함께 발급된 ‘가족집조’이고, 다른 1개는 아들 이승무 (19세)에게 발급된 이른바 ‘개인집조’ 이다. 이로서 성인에게는 개인 여권과, 미성년 자녀와 부인은 가장의 여권에 포함되는 ‘가족 집조’가 제도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집조는 가로 13 인치(33cm), 세로 12 인치 (30cm)의 한지(韓紙)인데, 오른 편에 개인 신상을 적어 넣게 되었고, 유효 기간이 1년임이 명시 되었다.
집조 왼편 위쪽에는 영문과 아래쪽에는 불문으로 이 집조 소지자에게 여행가방과 소지품을 가진 이 집조 소지자가 지체 없이 왕복 여행을 할 수 있도록 보호하고 협조하여 주기 바란다고 인쇄되어 있다.
이선일 가족의 집조에는 이전에 발급된 여권 혹은 집조에서 볼 수 없는 ‘정가금엽10량(正價金葉10兩)’이라는 문구가 집조 오른 편에 적혀 있다. 이로 미루어 집조 발급비를 지불해야 했음도 알 수 있다.
한인의 하와이 이민은 1905년 8월에 약 7,400명이 도착한 후에 끝이 났다.
대한제국이 자진하여 이민을 중지시켰다기 보다는 하와이 이민을 중지하라는 일본의 압력이 크게 작용을 했고, 멕시코로 이민 간(1905년 4월) 사람들이 어려운 처지에 있음을 알게 되었기 체면을 세우면서 하와이를 위시한 모든 지역의 이민을 중단하였다.
1905년 11월 17일 을사보호조약 이전에 이미 대한제국 국민의 하와이 이민조차도 일본에 의하여 좌지우지 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와이로 이민 온 7,400여명의 한인 중에는 640 여명의 부인과 550명의 어린 아이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하와이 이민은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황제가 공식으로 허가한 이민이었고, 또 처음으로 일반대중이 서양 문물을 접하게 되는 특이한 사건이었다.
특히 첫 이민단을 위하여 미국 선교사 존스가 제물포항에 차일을 치고 환송예배를 드리고 보낸 기독교적인 사건이기도 했다. 그리고 하와이를 한국의 가장 오래된 여권이 보존되어 있는 곳으로 만들었다.
참고로, 이승만이 처음으로 미국에 왔을 때 대한제국 외부가 1904년 10월 22일에 발급한 집조를 가지고 왔다.
<계속>
<사진설명: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한국 여권으로 첫 이민단의 한 사람인 이경도는 1902년 12월 20일에 ‘대한제국 해외여권’ 번호 41호를 발급 받았다. 일본으로 떠나기 2일 전에 받은 여권으로 1장의 한지로 한글과 한문 혼용의 원문과 영어 번역문과 불어 번역문이 함께 실려 있다. 사진 아래는 고영휴 해외여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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