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의 죽음을 지켜보면서 일단 허망함부터 느껴진다. 그의 생전의 행실과 그의 현재의 죽음을 비교할 때 더 그렇다. 죽은 당사자 개인에게서 느껴지는 허망함에서 시작해 그런 그를 놓고 난리를 펴는 북한과 관련 국가들을 보며 그 허망함은 더해진다. 무엇보다도 북한 인민들의 오열하는 모습은 내 안에 뭔가 형언하기 힘든 복잡함의 그림자만 드리워주고 있다.
가만 보면 장례식은 가운데다 침묵의 망자를 놓고 치르는 남아 있는 자들의 떠들썩한 행사에 불과한 것 같다. ‘그의 리그’가 아닌 ‘그들의 리그’인 셈이다. 김정일의 장례식은 특별히 더 그렇다. 엉뚱한 의미를 갖다 붙이며 이를 최대한 활용하려는 혐의가 엿보인다. 결국 향후 자기들의 기득권을 유지하고픈 안간힘일 텐데, 그 속 보이는 안간힘을 지켜보는 우리로서는 씁쓸하다 못해 애처로운 마음까지 든다.
아직도 눈에 선하다. 새 밀레니엄이 시작될 즈음 단기선교차 북한 접경지역을 돌아본 적이 있다. 압록강 상류에 위치한 중국 편의 한 도시에서 바라본 북한 쪽의 모습이다. 벌거숭이가 되어버린 거대한 백두산 한 자락에다 새겨놓은 섬뜩한 구호다. “민족의 위대한 태양 김정일 수령 동지.” 그때도 느낀 건데, 그가 태양이면 산들의 나무는 왜 죄다 배어 팔아먹어야 했을까. 그가 태양이면 지척에서도 감지되는 북한 동포들의 핏기 잃은 모습들은 과연 어디에서 연유된 것일까.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그런데 이제 그 태양이 죽었다. 태양이 살아있을 때도 그랬는데 태양이 죽었으니 앞으론 어떻게 될까, 이젠 궁금함 정도가 아니라 아예 걱정이다.
그의 죽음을 반면교사 삼아 배울 수 있는 점은 무엇일까? 죽음은 잘 해석되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누구의 죽음이든지 그래야 한다. 잘 해석되어야지 잘못 해석되면 안 되는 게 우리 각자가 언젠가는 맞이하게 될 죽음이다.
그럼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이러니하게도 잘 해석된 죽음은 죽기 전 살아있을 때 이미 다 드러나 버린다는 사실이다. 김정일이 ‘그렇게’ 살았으니까 지금 그의 장례식장에서 그의 죽음도 ‘그렇게’ 해석되고 있는 것이다. 그의 생전에 이미, 작금에 이뤄지는 자신의 죽음 해석의 모든 단초를 스스로 제공해 버린 셈이다. 그게 터무니없는 모양새로 되어 가고 있는 북한 정권의 해석이든, 주변 국가들의 정치적 셈법이 오가는 예리한 해석이든 말이다.
사실 살아가면서 가장 선명하게 예측할 수 있는 게 나의 죽음이다. 가장 확실하게 보장된 사건이기 때문이다. 다만 그게 언제가 될지, 어떻게 올지 몰라서일 뿐이지, 죽음만큼 예측하기 쉬운 인생사도 없다. 그런 점에서 죽음은 나의 일이다. 주관적인 사건이다. 객관화시킬 수 없는 사안이다. 장례식장 가면서 뭘 생각하는가? 죽은 이의 죽음을 객관적으로 해석하기 위해서 그 자리에 가는가? 아니다. 내 죽음을 주관적으로 내다보기 위해서다. 왜인가? 언젠가는 맞이해야 할 내 일이기 때문이다.
출판을 기대하며 쓴 책의 한 채프터의 주제가 “죽음과 친해지기”다. 거기서 나는 죽음을 이렇게 이야기했다. “죽음과 대면하는 게 불편한 일이 되지 않으려면 일단 죽음을 향해 능동적 자세를 취하면 된다. 무슨 말이냐면, 죽음이라는 주제를 회피하지 말자는 뜻이다. 회피하지 않아야 이와 더 적극적으로 친해질 수도 있고, 심지어는 환영하는 자세도 가질 수 있다. 회피하지 않는 자세는 죽음 앞에서 더 적극적이며 능동적인 자세를 갖도록 해준다. 또 죽음 문제를 더 정면으로 돌파해 슬픔이 아닌 기쁨의 사건으로, 거부가 아닌 수용의 사건으로, 추락이 아닌 승화의 사건으로 바꾸게 해준다. 그리고 실제로, 이것이 곧 우리를 향한 성경의 요구이기도 하다.”
당찬 새해를 시작해야 하는데 죽음 이야기부터 꺼내서 죄송하다. 하지만 기왕 살게 된 이 소중한 한 해를 더 멋지게 살아가야 하지 않겠는가? 하지만 한 해를 더 산다는 것은 죽음이라는 종착역에 한 걸음 더 다가갔다는 뜻임을 기억하자. 그러므로 멋지게 죽기 위해서는 멋지게 살아야 한다. 나의 멋진 죽음은 내 생전의 멋진 삶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잘 해석된 죽음을 내 것으로 만들기 위해 오늘도, 이 한 해도 잘 해석된 인생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내 장례식에서만큼은 김정일의 그것처럼 엉뚱한 해석이 나오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새크라멘토 수도장로교회 담임목사)
댓글 안에 당신의 성숙함도 담아 주세요.
'오늘의 한마디'는 기사에 대하여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남의 생각을 들으며 서로 다양한 의견을 나누는 공간입니다. 그러나 간혹 불건전한 내용을 올리시는 분들이 계셔서 건전한 인터넷문화 정착을 위해 아래와 같은 운영원칙을 적용합니다.
자체 모니터링을 통해 아래에 해당하는 내용이 포함된 댓글이 발견되면 예고없이 삭제 조치를 하겠습니다.
불건전한 댓글을 올리거나, 이름에 비속어 및 상대방의 불쾌감을 주는 단어를 사용, 유명인 또는 특정 일반인을 사칭하는 경우 이용에 대한 차단 제재를 받을 수 있습니다. 차단될 경우, 일주일간 댓글을 달수 없게 됩니다.
명예훼손, 개인정보 유출, 욕설 등 법률에 위반되는 댓글은 관계 법령에 의거 민형사상 처벌을 받을 수 있으니 이용에 주의를 부탁드립니다.
Close
x