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또 거리로 나섰다. 수만, 아니 수십만으로 보인다. 1년 내내 보아온 모습이다. 저 아프리카의 튀니지에서 아랍의 거리, 그리고 최근에는 러시아 수도 모스크바에 이르기까지.
개혁을 요구한다. 민주화를 외친다. 그 외침이 거대한 공명현상을 일으키면서 세계의 정치질서가 변모됐다. 이 현상에 주목해 타임지는 불특정의 ‘시위자’를 2011년의 인물로 선정했다.
그 2011년이 끝자락을 드러낸 시점. 또 다시 엄청난 인파가 쏟아져 나왔다. 과로로 숨졌다고 한다. 포도주와 코냑을 과도히 마셨다는 말인가. 기쁨조와의 열락의 시간을 과도히 가졌다는 것인가. 하여튼 ‘경애하는 지도자’가 과로로 숨졌다는 발표다.
그 죽음을 애도하는 물결이다. 네 댓살 난 유치원학생부터 백발이 성성한 노인에 이르기까지 말 그대로 온 연령층을 망라한 조문객들이 평양의 거리로 쏟아져 나온 것이다. 그 표정 표정이 그렇다. 박제(剝製)된 표정이라고 할까. 그로테스크하게 까지 느껴진다.
한 생각이 스친다. ‘평양의 봄은 과연 가능할까’ 하는 것이다.
온갖 시나리오가 펼쳐진다. 포스트 김정일의 북한은 어디로 갈 것인가 하는. 관련해 초미(焦眉)의 관심사는 북한의 새로운 통치체제가 과연 김정은 체제로 굳어질까 하는 것이다.
스탈린식 공산체제에서 지도자가 죽으면 반드시 뒤따르는 게 권력투쟁이다. 하나의 기본 명제다. 이에 비추어 볼 때 북한의 새 통치체제가 당장은 김정은 중심으로 뭉쳐 있는 것 같지만 머지않아 권력투쟁은 필연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숙부(북한의 경우 고모와 고모부)와 젊은 군주와의 권력분점이 성공한 예가 없다. ‘동양식 궁중 게임의 룰’이다. 이에 대입해 보아도 권력투쟁은 피할 길이 없다는 것이 다수의 지적이다.
타임지는 관련해 특이한 관측을 제시했다. 북한 군부가 김정은에 충성을 맹세했다는 로이터통신의 보도를 일축하고 나선 것이다. 아마도 그 반대일 것이라는 주장이다.
미숙한 김정은은 군부의 지지내지, 최소한 암묵적 동의 없이는 권력승계가 불가능하다. 때문에 군부 실세들의 필요에 따라 김정은이 선택됐고, 그가 군부에 충성을 하는 조건으로 형식상의 지도자로 추대됐다는 분석이다.
폭정체제는 공포와 폭력이 통치의 기본 수단이다. 체제유지의 그 궁극적인 의지 처는 근본에 있어 폭력집단인 군이다. 17년간 통치를 하면서 김정일이 내세운 정책은 선군(先軍)정책이다. 고난의 행군 시 수십, 수백만이 굶어 죽었어도 군은 배불리 먹일 정도였다.
왜. 답은 자명하다. 권력은 총부리에서 나온다. 군부 도움 없이 통치가 불가능
했기 때문이다.
선군통치가 강조됐다. 이것이 전하는 반어적 의미는 무엇일까. 무풍지대같이 보인다. 그러나 그 북한 내에서 반체제 움직임이 만만치 않았다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 아닐까.
사실에 있어 민중봉기, 무력충돌로 점철 된 게 그동안의 북한 역사다. 북한전문가들에 따르면 80년대에 청진, 무산, 함흥, 신의주 등지에서 잇달아 무장충돌이 발생했다. 1987년에는 제12호 수용소로 불리는 정치범 수용소에서 민중봉기가 발생, 5000여명이 진압군에 학살됐다.
심지어 특수층만이 거주하는 평양에서도 봉기가 일어나는 등 두 해 건너 한 번 꼴로 민중소요나 쿠데타기도가 있어왔었다는 것이다. 그래서인지 북한 당국은 아랍의 봄과 함께 ‘재스민 꽃 향기’가 날아들자 평양 시 곳곳에 탱크를 배치하는 등 극도로 긴장된 반응을 보였다.
“수령절대주의 추종 세력과 시장 세력이 첨예한 대립 상태에 있는 것이 현재의 북한이다.” 러시아의 북한 전문가 아드레이 란코프가 김정일이 살아 있을 때 한 말이다.
배급제 회복을 통해 개혁·개방의 바람을 막으려 들었다. 그래서 무리수를 둔 게 통화개혁조치다. 그러나 엄청난 반발이 뒤따랐다. 결국 경제 테크노크라트를 희생양으로 만들어 처형했다. 그리고 공식적인 사과까지 했다. 수령절대체제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400만의 핵심 분자를 뺀 나머지 2000만 가까운 북한주민은 모두 장마당을 통해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그 장마당에서는 물자만 유통되는 것이 아니다. 정보도 유통된다. 자유의 바람이 부는 곳이 장마당이다. 김정일 체제는 그 ‘불온한’(?) 시장세력 척결에 실패한 것이다.
“그들은 절박한 처지에 놓여있다. 부지런히 장마당을 헤집고 다니지만 여전히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 때문에 체제붕괴의 기미만 보였다고 하면 그 기회를 결코 놓치지 않을 것이다.” 유엔대사를 지낸 존 볼튼의 지적이다. 지나친 희망적 관측일까. 그럴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아무도 아랍의 봄을 예측하지 못했다. 한 튀니지 청년의 절망적인 몸부림이 수 십 년 독재체제를 잇달아 무너뜨리고 세계의 정치지도를 바꾸어 놓을지는. 북한 체제붕괴도 그렇게 오는 것이 아닐까. 그래서 한번 이런 그림을 그려본다.
“수십만이, 아니 수백만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불과 몇 해 전만 해도 경애하는 지도자의 죽음을 애도하던 그들이다. 그 표정부터가 달라졌다. 분노의 표정이다. 억지로 짜는 울음 대신 분노의 함성이, 자유를 갈구하는 외침이 평양의 하늘을 진동한다.”
“저것들 쇼하는 겁니다” 비굴한 미소를 띠며 굽실거리는 측근들을 보고 김정일이 납북됐던 신상옥 감독에게 한 말이라고 한다. 어쩐지 그 말이 새삼 떠오른다.
<옥세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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