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신지 이제 8개월이 된다. 그 동안 가능하면 어머니 생각을 안하려고 노력했다. 생전에 불효한 것도 많고 제대로 잘 못해 드려 후회가 막급한데 어머니 생각을 하면 너무 죄송스러울 것 같아서였다. 또한 워낙 눈물이 많은 내 스스로 감정 조절의 자신이 없는 것도 큰 이유였다.
어머니는 여느 할머니들과 마찬가지로 손주들을 끔찍히 사랑하셨다. 나의 두 여동생들 집에도 손주들이 있었으나 타주에 살아 멀리 있어 자주 못 보기에 가까이에 있는 두 친손주들에게 모든 사랑을 쏟으셨다.
결혼 후 부모님과 따로 살게 되었는데 맞벌이를 하는 우리 부부를 위해 어머니가 애들 베이비씨팅을 해주셨다. 남에게 맡기는 것보다는 할머니가 애들을 봐주시는 것이 애들에게 당연히 더 좋을 것이고, 따로 사는 손주들을 더 자주 보고싶어 하시는 할머니에게도 좋을 것이라 생각해서였다. 물론 애들을 봐주신다는게 어머니에게 항상 좋은 것만도 아니고 여러가지 힘든 점도 있으셨을 텐데 어머니는 불평없이 애들을 맡아 주셨다.
그런데 처음에는 오해를 사서 크게 혼 난적도 있었다. 남에게 애들을 맡기면 당연히 지불해야하는 베이비씨팅 비용을 어머니 용돈으로라도 쓰시라고 드렸는데 어머니는 그걸 굉장히 섭섭하게 생각하셨다. 절대 돈 받자고 애들을 봐주시는게 아니라는 것 잘 안다는 말씀을 드렸지만, 돈을 드릴 때마다 무척 어색해하며 화를 내셨다. 나중에 드리는 그 돈을 고스란히 모아 애들에게 사주고 싶으신 것도 맘 편히 사주실 수 있을 때가 되기까지 어머니와 서로 어색했던 기간이 제법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당시 버지니아주 알렉산드리아에 사셨던 부모님들은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 훼어팩스 집으로 이사했을 때도 애들을 쉽게 봐주실 수 있도록 우리집과 가까운 곳으로 따라서 이사를 하셨다. 사실 그때는 아버님도 아직 은퇴 전이라서 아버님 직장이 있는 워싱톤디씨에서 오히려 멀어져 출퇴근이 훨씬 더 불편해지는 상황이셨는데 부모님은 손주들과 나 그리고 집사람을 위해 그런 일상의 불편을 마다하고 이사를 하신 것이었다.
그런 할머니를 떠나 보내는 고별예배 때 나의 둘째 아들녀석이 할머니를 추모하는 인사를 했었다. 할머니가 돌아가시기 바로 전까지 대학생인데도 ‘우리 강아지’라고 부르시던 손주였다. 둘째의 추모사에는 그 전까지 나도 몰랐던 내용이 담겨 있었는데 손주를 배려하신 할머니의 깊은 사랑, 나도 배워야 할 마음 씀씀이가 배어 있었다.
우리집 앞뜰에는 도토리 나무들이 있다. 도토리가 자라서 익어 떨어지면 할머니께서 주워 가곤하셨다. 도토리묵을 만드시기 위해서였다. 다람쥐와 경쟁을 하는 할머니의 모습이 재미있기도 했지만, 도토리가 나중에 묵으로 만들어져 반찬으로 밥상에 올려지거나 간식거리로 제공되는 것이 더 신기하게 느껴졌다.
한 번은 둘째가 초등학교 때 학교에서 필드트립을 갔다가 도토리 나무들이 많은 곳에 가게 되었고, 나무 아래에 많이 떨어져 있는 도토리를 보게 되었단다. 할머니 생각이 난 둘째는 그 중 보기 좋은 큰 놈들을 골라 모으기 시작했다. 할머니에게 갖다 드리기 위해서였다. 제법 많은 도토리를 주워 모은 둘째는 마음이 뿌듯했다. 좋아하실 할머니의 얼굴을 떠올리기만해도 기분이 절로 났다.
둘째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통학버스를 타고 할머니 집 바로 앞에서 내려 곧바로 할머니 집문을 열고 들어갔다. 그리고 주워온 도토리를 모두 내어 놓았다. 물론 할머니가 기뻐하셨던 것은 예상대로였다. 그런데 그 다음이 예기치 못했던 일이었다. 크고 보기 좋았던 도토리 대부분이 사실은 벌레먹어 썩어 있었던 것이었다. 할머니는 손주가 미안해 할까봐 벌레먹은 것에 대해 아무런 말씀을 안 하시고, 대신 칼로 일일이 상한 부분을 도려내는 이중수고 끝에 그 나머지를 모아 기어코 손주가 모아온 도토리를 가지고 묵을 만드셨다. 손주의 정성을 생각한 할머니식의 배려였다.
고별예배 때 처음 듣는 이야기였는데 나의 마음 속을 깊이 다시 한 번 울려 주었다. 평생 그렇게 사셨던 어머니셨다. 이제 내일 모레면 기독교인에게는 가장 큰 사랑을 상징하는 예수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크리스마스다. 크리스마스를 맞아 돌아가신 어머니의 사랑을 조금이라도 더 닮아가는 삶을 살아야 하겠다는 다짐을 한다.
독자 모두에게 메리 크리스마스 인사를 드린다.
변호사
훼어팩스 카운티 교육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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