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의 지휘자로 명성을 떨쳤으나 예민하고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사람들과 끊임없는 갈등을 빚었던 구스타브 말러. 불안과 고독, 운명과 죽음이 서린 교향곡들을 남겼다.
고독·체념의 정서가 모태…번스타인 통해 붐 일어
정명훈“우주 같은 그의 음악 연주하려 지휘자 됐다”
내년 두다멜-LA필 프로젝트에 팬들 벌써 기대 만발
이 기사를 쓰기 위해 오랫동안 준비했다. 몇 년 전부터 서서히 말러 음악에 심취해 오던 차, 두다멜과 LA 필하모닉이 내년 초 말러의 10개 교향곡(미완성 10번 포함)을 모두 연주하는‘말러 프로젝트’에 도전한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내 마음은 흥분되고 바빠지기 시작했다.
바그너의‘링 사이클’을 일생에 한 번 보기가 쉽지 않듯이, 말러 교향곡 전 사이클을 라이브로 들을 수 있는 경험 역시 흔치 않기에 이 특별한 기회를 최대한 즐기기 위해 책을 읽고 영화를 보고 음반을 들으며 공을 들였다. 번스타인처럼, 정명훈처럼, 사이먼 래틀처럼, 두다멜처럼, 그리고 전 세계의 수많은 음악팬들처럼, 나도‘말러리아’가 되었다.
구스타브 말러(1860~1911)가 베토벤을 밀어낸 지는 꽤 됐다. 말러는 오늘날 가장 사랑받는 음악가요, 가장 중요한 교향곡 작곡가로 취급받고 있다. 생전에 작품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한 말러는 “나의 시대가 올 것이다”라고 말했는데, 과연 그가 죽은 지 100년이 지난 지금 전 세계는 말러 열병을 앓고 있다.
그의 탄생 150주년이던 2010년에는 우리나라에서만 서울시향, 부산시향, 대전시향이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를 시도했을 정도로 전 세계적으로 말러 연주가 붐을 이뤘다. 사망 100주기를 맞은 올해 LA필과 두다멜이 북미와 남미를 아우르는 말러 여정을 시작한 것은 사실 그다지 특별한 일이 아니다.
말러 교향곡 전곡 연주는 이제 세계 유수의 오케스트라가 꼭 거쳐 가는 레퍼터리가 되었으며, 지휘자라면 도전해 볼 필수 아이템이 되었다. 바야흐로 ‘말러의 시대’가 온 것이다.
1960년대에 레너드 번스타인이 말러교향곡 전곡을 녹음해 ‘말러 붐’을 일으킨 것이 시작이었다. 자신을 ‘말러의 환생’이라고 말할 정도로 말러를 사랑했던 번스타인은 존 F. 케네디 대통령이 암살당했을 때 말러교향곡 2번으로 추도사를 대신했고, 동생 로버트 F. 케네디 장례식에서는 교향곡 5번의 아다지에토 악장(영화 ‘베니스의 죽음’으로 유명해진 악장)을 지휘했다.
이후 말러 팬은 꾸준히 늘어났고 베토벤이나 브람스를 거치지 않고 말러로 교향곡에 입문하는 음악 팬이 늘어났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수많은 미국의 오케스트라들이 예정된 프로그램 대신 말러를 무대에 올렸고 라디오 방송들은 쉬지 않고 교향곡 2번, 5번, 9번을 틀어댔다.
한 교사는 “말러의 음악만이 이렇게 견디기 힘든 상황을 견뎌나갈 수 있게 하는 인간적인 유대감을 준다”고 했을 만큼 말러 음악은 치유력을 가진 것으로도 유명하다. 병으로 고통 받는 이들의 마지막 순간에 말러를 연주해 주면 환자도, 그를 돌보는 이들도 많은 힘을 얻는다는 것이다. 현대음악과 영화음악들은 모두 ‘말러의 방언’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1990년 이후 제작된 영화 중 최소 20편 이상이 말러의 음악을 사운드트랙으로 쓰고 있고, 심지어 록 음악에도 말러 이펙트가 진입해 그레이트풀 데드, 핑크 프로이드, 킹 크림슨, 블루 나일 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
번스타인 이후 수많은 세계적 연주자들은 말러를 음악의 최고봉에 올려놓고 있다. 정명훈은 “말러 작품을 연주하기 위해 지휘자가 됐다. 연주할 때마다 더 배우고 더 깊이 파고 들어갈 수 있는 ‘광활한 우주’ 같은 음악이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베를린 필의 사이먼 래틀은 “나도 ‘말러리아’(말러의 작품을 열광적으로 좋아하는 음악팬)라고 할 정도로 말러를 좋아한다. 그의 작품은 내가 지휘자가 되게 한 원동력이다. 내 DNA에 말러가 있다”고 했다.
2006년 게오르그 솔티 지휘 콩쿠르에서 여성으로는 처음 우승한 성시연(보스턴 심포니·서울시향 부지휘자)은 바로 다음해 독일에서 열린 구스타프 말러 지휘 콩쿠르에 참가했다. 한 콩쿠르 우승자가 다른 대회에 참가하는 것은 드물기 때문에 심사위원들이 이유를 묻자 그녀의 대답은 간단했다. “말러를 지휘하고 싶어서”라고. 이 콩쿠르에서 그는 1위 없는 2위를 차지했다.
어린 시절부터 말러를 사랑했다는 두다멜은 16세 때 처음 지휘봉을 잡으면서 말러 교향곡 1번을 지휘했고, 2004년 제1회 구스타브 말러 지휘 콩쿠르에서 우승하면서 유명해졌으며, 2009년 LA필에 부임할 때 디즈니 홀에서 처음 연주한 곡도 말러 1번이었다.
그래서 왜 지금 말러인가? 말러는 누구인가? 그의 음악은 왜 우리를 울게 만드는가? 말러는 왜 우리를 아프게 하는 동시에 위로하고, 내치는 동시에 쓰다듬는가? 어째서 들을 때마다 낯설고, 또한 슬프도록 친숙한가?
이에 대해 인생 전부를 말러 연구에 바쳐온 영국의 음악평론가 노먼 레브레히트(Norman Lebrecht)는 2010년 출간한 ‘왜 말러인가?’(Why Mahler?)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마치 터널 저편 끝에 보이는 한 줄기 빛처럼 말러의 음악은 멀리서부터 우리에게 다가와 거부할 수 없는 목적지로 우리를 이끈다. 교과서적 분석을 거부하는 말러의 음악은 고상한 동시에 천박하고, 독창적인 동시에 파생적이며, 숨이 멎을 정도로 아름다운 동시에 진부하기도 하다. 그의 음악은 지적이고 반어적인 담론이 오가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심리게임이며 자기발견과 자기위안, 자기갱신으로 이루어진 삼중의 감정 탐험길이다. 말러를 안다는 것은 곧 우리 자신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게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보헤미아(현재 체코 땅) 태생의 오스트리아 작곡가 말러는 ‘삼중으로 고향이 없는’ 사람이었다. 오스트리아인들 사이에서는 보헤미아인이요, 독일인들 가운데서는 오스트리아인이며, 세계에서는 유대인이었고, 유대인이면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콤플렉스로 인해 평생 자기 정체성에 대한 불안이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그는 언제나 불청객이었으며 어디서나 환영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말러는 당시 세계 음악의 메카였던 빈이 열광했던 최고의 지휘자였으나 괴팍하고 예민하며 직설적인 성격 때문에 비평가들과 언론, 수준 미달의 연주자들 및 반대파들과 끊임없는 갈등과 불화에 시달렸다.
게다가 어린 시절 다섯 명의 형제가 관에 실려 나가는 것을 목격했던 경험, 19세 연하 아내 알마의 외도와 지극히 사랑했던 딸의 죽음으로 촉발된 가정의 불행, 강행군에 가까웠던 오케스트라 지휘자로서의 초인적 스케줄의 압박 등 고독하고 극적이며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던 천재 작곡가는 그가 체험하고 느낀 모든 것을 음악 속에 표현하려 했다.
평생을 이방인으로 살아야 했던 인간으로서 세상 그 어느 곳에도 소속되지 못한다는 어두운 상처, 체념의 정서가 그의 음악의 모태가 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말러 음악의 본질은 불안이고 고독이며, 운명이다. 혼돈, 열정, 사랑, 죽음의 이미지 속에서 그의 음악은 구원을 향한 몸부림으로 가득 차 있다. 헤아릴 수 없는 깊이와 아름다움을 품고 감각에 직접 다가오는 그의 음악은 가슴을 울리고 영혼을 지배한다. 고독의 뿌리까지 내려가 극히 개인적인 맨살의 감정을 건드리고 그 깊은 바닥에서 다시 살아남으로써 고통과 환희를 함께 경험케 하는 특별한 마력, 21세기의 현대인들이 말러의 음악에 공감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이제 서른 살의 구스타보 두다멜이 연주하는 구스타브 말러는 어떤 음악 이 될 것인지 가슴이 두근거릴 정도로 궁금하고 기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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