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 정 희 논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라는 광고 문구가 한국에서 한동안 유행어처럼 쓰였다. 1년 내내 열심히 일했으니 “당신, 휴가 갈 자격 충분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심신을 얽어매는 일의 굴레에서 잠시 벗어나 보라는 유혹, 어딘가로 떠나서 현실을 잊고 마음껏 즐겨보라는 유혹 -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설레게 했다.
노동의 단위를 1년이 아니라 평생으로 바꿔도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는 유효하다. 수십년 열심히 일했으니 “당신, 이제 노후를 즐길 자격 충분해!”라는 말이 된다. 아등바등 시간에 쫓기며 살던 ‘젊은 날의 현실’을 뒤로 하고 편안하게 여생을 즐기기 위해 떠나는 새로운 현실 - 바로 ‘은퇴’다.
미국에서 20세기까지 은퇴는 근로자들의 ‘가나안 복지’였다. 직장 연금제도가 탄탄해서 젊은 날 땀 흘려 일한 수고는 ‘젖과 꿀이 흐르는 땅’ 즉 안락한 은퇴를 보장했다. 65세 즈음 은퇴하고 나면 모빌홈 끌고 미 전국을 여행 다니거나, 전 세계 관광지를 찾아다니는 것이 미국 노인들의 보편적인 삶이었다.
이제 그 모두가 과거로 사라지고 있다. 일한 햇수로는 은퇴자격이 충분하지만 돈이 없어 은퇴를 못하는 것이 중산층의 현실이 되고 있다. 공중전화, 타자기, 레코드판 … 20세기와 함께 사라져 간 추억의 목록에 ‘은퇴연령’이 추가되고 있다. ‘나이’가 아니라 ‘돈’이 은퇴시기를 결정하는 각박한 시대로 진입하고 있다.
웰스 파고가 연례 은퇴 설문조사 결과를 이번 주 발표했다. 조사는 지난 8월과 9월 중산층(가구당 연소득 5만~10만 달러, 투자가능 자산 10만 달러 미만) 성인(25~75세) 1,500명을 대상으로 전화 인터뷰로 실시되었다.
그 결과를 보면 중산층의 3/4은 나이가 되었다고 은퇴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입장이다. 기존의 은퇴연령인 65세를 기준으로 하면 기대여명이 보통 30년 쯤 되는데, 그 긴 세월 먹고 살 것도 마련되지 않은 채 덜컥 일을 그만둘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들이 은퇴자금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목표액의 중간값은 35만 달러. 반면 실제로 은퇴를 위해 모아둔 중간 저축액은 2만5,000달러에 불과하다. 그달 그달 페이먼트, 자녀들 학비 대기에 급급한 중산층 살림살이로는 몇만 달러 모으기도 벅차다. 60대의 10명 중 3명은 은퇴 저축금이 2만5,000달러가 못된다고 대답했다.
그러다 보니 남은 방법은 한가지뿐이다. 수입을 위해 계속 일을 하는 것이다. 은퇴 나이가 지나도 일을 놓지 않을 것이라는 응답이 전체의 3/4를 차지했다. 그리고 네 명 중 한명은 은퇴 후 편안하게 살려면 “최소한 80살까지는 일을 해야” 할 것이라고 대답했다. 은퇴를 위해 은퇴를 못하는 아이러니가 벌어지고 있다.
‘80세까지의 취업’은 간단한 일이 아니다. 우선 육체적 정신적으로 업무 수행 능력이 있을 지가 문제다. 개인차가 있을 것이다. 다음은 고령에 취업 기회가 얼마나 있을 지가 문제가 된다. 나이 들수록 취업하기가 어려운 것이 현실이다. 은퇴 직전인 55~64세 연령층 중 취업하고 있는 비율은 지난 2008년 62.1%에서 2010년 60.3%로 떨어졌다.
그리고 무엇보다 문제는 노동시장에 미칠 파장이다. 20대 중반에 들어오고 60대 중반이면 물러나면서 돌아가는 노동시장의 구도에서 고령자들이 버티고 있으면 그러잖아도 심각한 청년실업은 더욱 심각해 질 수밖에 없다.
길어진 수명이 양날의 칼이 되고 있다. 웬만하면 90대까지 사는 수명은 축복이자 부담이다. 교육가로 오래 일하다 은퇴한 분이 있다. 은퇴하고 나니 좋은 점이 많다고 했다. 매일 출근하느라 일찍 일어나던 걸 안 해도 되니 좋고, 하루 전체가 ‘내 시간’인 게 뿌듯하다고 했다. 교육 공무원 연금으로 매달 이전 월급의 70% 정도가 나오니 “사치하지 않으면 살만 하다”고 했다.
그런데 그 연금을 한 두해 타고 마는 것이 아니다. 아마도 앞으로 30년은 타게 될 텐데 “정부의 재정적자 폭을 볼 때 이런 연금제도가 결국은 문제가 되고 말 것”이라고 그는 말했다. 은퇴라는 산 앞에서 중산층은 점점 고달프다. 부유층은 부의 날개로, 빈곤층은 정부 보조의 날개로 날아오르지만, 중산층은 날개가 없다. 자력으로 날아야 하는 데 상황이 암울하다. 은퇴자금, 주택 가치는 지난 금융위기로 반토막 나고, 소셜시큐리티, 메디케어 혜택은 언제 깎일지 모른다. 거기에 집 모기지 페이먼트까지 남아있다면 은퇴는 요원하다.
열심히 일한 당신, 앞으로도 계속 더 일을 해야 할 것 같다.
junghkwon@koreatime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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