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쁜 주말 스케줄을 다 마친 일요일 저녁 잠깐 숨을 돌리고 있는데 대학교 3학년인 둘째로부터 전화가 왔다. 평소 전화가 별로 없던 터라 반갑기도 했지만 무슨 일이 있나 긴장도 됐다. 그런데 다짜고짜로 지금 막 병원서 나오는 길이라는 거다. 껄껄 웃으면서 말이다.
얘기인 즉 친구들과 농구를 하다 손가락 하나를 다쳤다는 것이다. 골절이 되었단다. 병원에 들어올 때까진 제법 보기가 흉했는데 치료를 받고 난 지금은 다행히 괜찮다고 한다. 병원에서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긴 했지만 그래도 걱정 말라면서 이제 학교로 돌아가기 위해 부른 택시가 와서 전화를 끊어야겠단다. 한 1분여 정도의 짧은 통화가 전부였다. 그래도 전화를 해준 게 고마왔고 목소리가 밝아서 안심은 되었다.
둘째가 농구 때문에 손가락을 다친 것은 사실 이번이 벌써 세 번째다. 둘째는 아주 어렸을 때부터 농구를 좋아했다. 제 부모를 닮아 크지 않은 키의 불편함을 날렵한 동작으로 커버했다.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4년 내내 농구선수로 활동했다. 덕분에 나도 게임 구경을 실컷 할 수 있었다. 물론 체면 불구하고 큰 목소리로 응원을 해대는 나의 모습이 둘째에게 종종 지적의 대상이 되곤 하였지만 말이다.
둘째의 포지션은 포인트가드였다. 공격 시 공을 드리블하고 올라와 슛 찬스를 만들어 내는 게임메이커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공을 상대편 선수에게 뺏기지 않고 갖고 있어야 하는 시간이 다른 선수들보다 월등하게 많았고 손가락을 다칠 수 있는 가능성도 덩달아 높을 수밖에 없었다. 11학년 때 시즌 시작 전 연습기간 중 처음으로 손가락 골절상을 입었다. 정형외과 의사에게 찾아가 치료를 받고 며칠간 연습을 못했으나 시즌이 시작되자 곧 담당의사의 허락을 받아 손가락을 단단히 테이프로 묶어 고정 시킨 후 시합을 뛰었다.
그러나 12학년 때 손가락을 다시 다쳤을 때는 상황이 좀 달랐다. 이번에도 시즌을 준비하는 연습기간 중이었지만 뼈가 아무는데 생각보다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리고 급히 찾아갔던 응급실 담당 의사가 쉽게 시합에서 뛸 수 있도록 허락해 주지 않았다. 손가락이 제대로 아물 때까지 출전이 안 된다는 것이었다.
팀의 코치도 당연히 의사의 허락 없이는 시합에서 뛸 수 없다는 입장을 취했다. 이미 두어 게임을 놓친 둘째는 속이 타는 듯 했다. 주전 포인트가드로서 팀에 대한 책임도 있었지만 그토록 좋아하는 게임을 멀뚱히 앉아서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상황을 힘들어 했다.
이때 둘째가 내 놓은 제안이 아주 기가막혔다. 이번에 자신을 치료한 응급실 담당 의사는 젊어서 경험이 상대적으로 부족해 너무 조심스럽게 처리를 하는 것이라며 11학년 때 치료를 해 주었던 연세 드신 정형외과 의사에게 찾아가 의견을 구하면 다른 답을 들을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의 시간도 경과했으니 11학년 때와 마찬가지로 그냥 손가락을 단단히 감싼 후 출전할 수 있도록 허락해 줄 수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었다.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으론 만약에 그럴 경우 과연 어느 의사의 의견을 따라야 할 것인지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봉착할 수도 있겠다는 걱정도 들었다.
하지만 둘째의 주장은 단호했다. 더 이상 그냥 앉아서 기다릴 수는 없고 두 번째 의사의 허락으로 시합에 출전했다가 손가락이 더 잘못 될 수도 있는 위험부담을 감수하겠다는 것이었다. 둘째의 간절한 부탁을 계속 못 들은 척 할 수 없었고 어쩌면 이제 그런 결정은 스스로 해야 할 나이가 되었다는 생각도 들었다. 연세 드신 그 정형외과 의사를 급히 찾아갔다. 그리고 둘째의 예상은 적중했다. 둘째는 결국 그냥 단단히 손가락을 감싸고 시합해도 좋다는 의사의 허락을 받아내고야 말았고 시합에 출전했다.
그때 다쳤던 둘째의 손가락은 지금도 조금 굽어 있다. 그게 그때 무리하게 시합에 출전한 후유증으로 그렇게 된 것인지 아니면 그것과는 상관없는 이유 때문인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손가락을 사용하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다. 그리고 그때의 결정에 대해서 둘째나 나나 후회가 없다.
특히 자라면서 세살 위의 형에게 항상 여러 가지 결정을 의존해 왔던 둘째가 스스로 중대한 결정을 내린 것을 존중해 주었다는 것이 잘 한 것이란 생각이 든다. 아직도 가끔 둘째가 내려야 할 결정에 간섭하고 싶은 충동이 들 적이 있는데 그럴 때마다 제발 자제해야 한다고 다짐하곤 한다.
내가 좀 더 성숙한 아버지가 되어가고 있는 것이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면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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