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아침, 오전 성무일도를 마치고 여느 때와 같이 피아노에 앉아 요즈음 연습하고 있는 바하의 이탈리안 콘체르토 악보를 펴고 한 음 한 음 소리를 가슴에 새기고 있었다. 매일 아침 성무일도 후에 주어지는 2시간의 침묵의 공간은 나라는 실존을 이루고 있는 나의 영혼과 세포가 서로의 존재를 인식하고 인정해나가는 시간이다. 그리고는 궁극적으로 하느님과 나와 자연의 하모니 관계가 극대화 되는 것을 체험하는 시간이기도 하다. 이때에 이루어지는 기도와 묵상과 피아노의 소리는 이 세상 그 어떠한 명약과도 바꿀 수 없는 천국의 실제 임재를 맛보는 시간인 것이다.
바하를 치다 문득 나의 시선을 악보에서 창밖으로 옮겨놓게 하는 그 어떤 것들의 움직임이 있었다. 잔잔한 가을 바람이 이미 몸통을 드러낸 나뭇가지들을 흔든다. 이에 나의 시선을 의식이라도 한 듯 덩달아 나뭇잎들도 불꽃놀이처럼 자신들을 공중에 내던진다. 창 밖에서 벌어지는 자연의 몸짓과 창 안의 공간에서 벌어지는 바하의 소리가 참으로 잘 어울리는 가을 정취라 여기고 있을 때에 문득 또 하나의 영감이 불현듯 솟아오르며 자기도 끼어달라고 의식 속으로 비집고 들어온다.
지난 주 수요일 볼티모어 컨벤션 센터 바이오 아티스트 초대전에서 보았던 정은미 작가의 암을 주제로 한 작품들이었다. 모두 네 편의 작품이 벽에 걸려있었다. 조명 장치가 되어있지 않아 작품의 실체를 드러내기에는 아쉬운 점이 있었지만 곧 그러한 여건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작가의 설명을 들으면서 작품 감상의 차원이 다만 육안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작가 이외수씨는 이런 말을 했다. 사람에게는 네 개의 눈이 있다고. 눈으로 보는 육안, 머리로 보는 뇌안, 마음으로 보는 심안, 그리고 영으로 보는 영안. 작품을 보던 나의 눈이 틀과 구도, 재료와 색상을 바라보던 육안에서 뇌안으로 옮겨지고 보니 그 작품의 배경과 철학, 과정과 탄생을 이해하게 되었다. 작가는 설명을 계속 이어갔다. 자신이 암과의 투병에서 승리한 캔서 서바이버라고. 이 대목에 이르렀을 때에 나의 눈은 더 이상 뇌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이미 심안으로 옮겨가고 있었다. “이것 보세요. 제 몸에서 떨어져 나간 분신들이에요. 요렇게 작은 덩어리들이 자꾸 모이고 뭉쳐서 이렇게 큰 덩어리가 된 것이지요.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는 그 유명한 말처럼 쟤네들도 살겠다고 몸부림친 것이지요. 그러나 자신들이 성하겠다고 몸부림치는 그 방향이 결국 그 끝은 나와 함께 종말을 맞이해야 한다는 공동의 운명체인 것도 모르는 체 말이지요."
작가의 눈가에 눈물이 글썽거린다. “저에게 만일 신앙이 없었더라면 그 투병과정을 어떻게 감당해 낼 수 있었겠는지 상상하기 어려워요. 저에게 제 2의 인생을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어요. 이제는 암이 더 이상 증오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니라 극복할 수 있고 다스려질 수 있다는 것을 체험한 사람으로서 암이란 소재를 예술과 접목시켜 승화시켜 본 작품들이에요. 암을 결코 미화 한 것이 아니지요."
작품을 열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나는 심장이 뚝 멎는 듯한 충격과 함께 시선이 한 군데에 집중되어 멈추어 버렸다. 어린이 주먹만한 크기의 빨간 암 덩어리에 은과 다이아몬드로 만들어진 작은 십자가 일곱 개가 박혀 있었다. 사치인가 아니면 승화 예술인가? 극복해낸 암 덩어리 위에 꽂힌 십자가, 그것은 마치 골고다의 언덕 위에 세워진 십자가와도 같이 보였다. 그러나 수치와 모욕의 나무 십자가가 아니라, 승리와 존귀의 십자가, 빛나는 하얀 세마포로 입혀진 십자가가 하느님의 완전수인 ‘일곱’을 이루고 그 언덕 위에 우뚝 서 있는 것을 보고 나는 울었다. 작가도 울었다.
시인 도종환 씨가 이런 말을 했다. “울지 않고 쓴 시는 독자들의 눈물을 이끌어낼 수 없다.” 정은미 작가의 눈물이 이 네 개의 작품 속에 스며들어 있음을 느낀다. 아 그러고 보니 예수님도 함께 울고 계신다. 이 작가 자매님을 위한 축복기도를 마치고 시계를 보니 벌써 교회 집무실에 나갈 시간이다. 한 번 더 피아노에 앉아 바하를 만져보고 나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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