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이란 원래 있는 것이 아니다. 누군가가 앞서 걸었기 때문에 생긴 것이다.
숲속에서 길을 걷다 보면 가끔 오래된 오솔길을 발견할 때가 있다. 사람의 자취가 드문 샛길이다. 가야할까 말아야할까, 문득 우리는 미지의 길 앞에서 갈등할 때가 있다. 걷고 싶지 않은 낯선 길… 그러나 왠지 또 걷고 싶은 길… 우리는 너무나 편한 길, 큰길(大路)에만 길들여져 있다. 그래서 당연히 그 길을 걷게 된다. 아무도 걷지 않는, 미지의 길을 즐기는 사람들은 아마 탐험가들일 것이다. 아주 주체성이 강한 사람들… 위대한 사람들이란 이런 탐험가들을 말하는 것일까? 알 수가 없다. 어린시절 행운을 가져다 준다는 네잎 클로바를 찾기 위해 잔디밭을 뒹군 경험이 누구나 있을 것이다. 수많은 클로바들 중에서 네잎 클로바는 결코 많지 않았지만 네잎 클로바를 찾으려고 잔디밭을 뒹굴다 보면 어느새 마음 조차 파랗게 물들곤 했었다. 희망을 찾으려는 의지, 아마 이런 것들이 우리를 낯선 길로 인도하는 것은 아닐까? 알 수 없지만 왠지 우리를 잡아 당기는 힘… 이런 것들이 우리를 낯선 길로 인도하고, 길을 만드는 원동력이 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낯선 길, 낯선 음악들, 그렇지만 어딘가 잡아 당기는 힘… 이런 것들이야말로 아날로그가 주는 매력일 것이다. 디지탈시대의 걷잡을 수 없이 빠른 템포, 누구나 찾고, 걷게 만드는 통속의 회오리바람… 이러한 디지탈 시대에서 가끔 우리는 낯선 오솔길을 걷고 싶어질 때가 있다. 아주 오래된… 옛날 이야기 같은 그런 소박한 길을 걷고 싶어질 때가 있다. 화려하고 우렁차진 않지만 소박하게 울려오는 마음의 소리… 시골의 보리밭 길, 잊혀진 음악가의 그러한 선율…
초등학교 5학년 때 우리 집은 이사를 했고, 나는 전학을 가지 않으면 안됐다. 당시만 해도 변두리에 속했던 뚝섬 끄트머리의 자양동이란 곳이었다. 모든 게 시골 같은 곳이었다. 코흘리는 아이들도 있었고 학교도 작았으며 시설도 낡은 곳이었다. 아이들이 복도에 쭈그리고 앉아 초를 바르고 차돌맹이로 문질러 광을 내곤 하는 광경은 시내학교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모습이었다. 건물도 달랑 2개. 그 중 신축한 3층 건물이 6학년 교실로 쓰던 곳이었다. 6학년 담임선생은 껑충하게 키가 크고 깡마른 데다가 커다란 안경을 쓰신 분이었다. 장이 안좋아서 늘 결근을 하셨고 그러면 우리는 옆 반으로 몰려가 꼽사리 수업을 받지 않으면 안됐다. 그 분은 올갠을 잘 치시는 분은 아니었지만 그럼에도 서툰 솜씨로 올갠을 치며 노래하는 음악시간을 좋아하셨는데 그분이 좋아했던 곡이 바로 ‘보리밭’이었다. 초등학생들에겐 결코 쉽지 않은 노래였지만 그분은 자신이 좋아했던 보리밭을 우리에게 강요하듯 열심히 가르쳐 주었다. 결국 여름방학 때 큰 수술을 받고 건강이 다소 회복되었지만 얼굴엔 늘 어두운 그림자가 겹쳐있곤 했다. 한강이 가까웠던 그곳은 넓은 무우와 배추밭이 주위에 펼쳐져 있어 가을이면 아이들이 밭에서 공을 차며 뛰어놀았다. 여름이면 사람 키 만큼 자란 옥수수밭에 숨어들어가 옥수수 서리를 하는 것도 그 곳 아이들에겐 큰 즐거움이었다. 그래서 인지 ‘보리밭’을 배우던 당시, 보리밭은 잘 떠오르지 않았고 왠지 옥수수 밭과 늘 혼동이 되곤 했다. 무성하게 자란 옥수수대 위에 자연 교과서에서 본 보리 열매를 살짝 얹어 놓은 모습, 그것이 보리밭에 대한 이미지의 전부였다. ‘보리밭 사이길로 걸어 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 다소 낭만적이어야할 가사가 시작되면 옥수수 밭에서 숨박꼭질 하던 생각이 떠오르곤 했다. 그래서 ‘보리밭’은 여지껏 낭만의 선율, 서정의 가곡보다는 늘 보리냄새가 풍겨오는 노래로 남아있다.
윤용하… ‘보리밭’작곡가로서 ‘나뭇잎 배’, ‘노래는 즐겁다’등도 작곡하신 분이다. 일제 강점기 때(1922) 황해도에서 태어나 음악활동을 하신 분이다. 천주교 가정에서 태어난 덕에 성당(가톨릭)을 중심으로 음악활동을 했지만 그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1951년 부산에서 박화목 선생(시인)과 함께 작곡한 ‘보리밭’이었다. 6.25 전란으로 황폐해진 민중의 마음을 푸근하게 적셔주겠다는 일념으로 작곡한 ‘보리밭’은 곧 온 국민이 애창하는 국민 가곡이 되었지만 그 때는 이미 작곡가가 세상을 떠난 뒤였다.(1965년 43세로 사망했음) 음악을 전공하진 않았지만 타고난 재능으로 약관 20세 때에 오페라를 작곡했고 해방후 용정 사범 학교, 한양공고 등에서 교편을 잡기도 했지만 술과 가난, 현실과의 불협화음으로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말았다.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쉬운 노래, 그러나 어딘가 우리 민족의 애환… 텅빈 외로움이 느껴져 오는 곡 ‘보리밭’ … 늘 초등학교 당시, 안경 너머로 공허한 눈빛을 반사하며 ‘보리밭’을 노래하던 담임 선생님의 얼굴이 떠오르곤 한다.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뉘 부르는 소리 있어 발을 멈춘다/옛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저녁노을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 /옛생각이 외로워 휘파람 불면/고운 노래 귓가에 들려온다/돌아보면 아무도 뵈이지 않고/ 저녁노을 빈 하늘만 눈에 차누나.
원래의 제목은 ‘옛생각’이었으나 작곡을 하면서 ‘보리밭’이 되었다고 한다. 1953년에 발표되었으나 주목을 끌지 못하였고, 작곡가가 사망한 뒤 교과서에 수록되는 등 큰 인기를 끌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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