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정찬열의 최전방지역 도보행진
▶ <9> 화천서 이외수씨와의 만남
횡단 아홉째 날이다. 어제 저녁은 이정태씨 댁에서 잤다. 엊그제 주유소에서 만났던 분이다.개구리 울음소리에 잠을 좀 설쳤다. 개굴개굴... 온 동네가 떠나갈 것처럼 밤새 울었다. 몇 십 년 만에 듣는 고향의 소리였다.
아침밥상에 봄나물이 상큼하다. 헤어지면 그만인 낯선 나그네를 집에 불러 재워주는 주인을 생각한다. 나는 언제 누구에게 이런 친절을 베푼 적이 있었을까. 아주머니가 5년 전 산삼 캤던 이야기를 해 주신다.
산나물을 뜯으러 평소보다 좀 험한 산을 올랐는데 바위 밑에서 산삼을 발견했단다. 이 부근 산은 지뢰가 많아 1년에 한두 건씩 지뢰가 터져 사람이 죽거나 상하는 사고가 난다. 그래서 가급적 평소 다니지 않는 곳은 가지 않는다. 그런데 그날은 꽤 깊은 데까지 들어가 나물을 뜯다가 바위 밑에서 산삼을 발견했다.
화천군서 거쳐 마련해 모셔와 날마다… 팬들로 북적
“다음부터는 형님으로 모시겠다”는 말에 너털웃음만
산삼은 새들이 삼씨를 먹고 산 기슭에 똥을 싸 놓아 싹이 터서 자라게 된다. 모삼이다. 모삼은 별로 쳐주지 않는다. 모삼이 자라 다음 해에 아들 삼이 생겨나고, 아들 삼이 씨앗을 맺어 떨어지면 손자삼이 생겨나고, 그렇게 대를 이어 산삼이 번식하게 된단다. 그런데 아주머니는 운 좋게 모삼과 아들삼, 그리고 손자 삼을 함께 캐는 횡재를 누렸다.
이야기가 흥미진진하다. 춘천 감정소에 가지고 가서 물어보니 “한 뿌리에 소 대여섯 마리 값은 받아야겠다”고 하더란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팔면 돈이야 좀 만져보겠지만 우리 같은 사람이 큰 돈 주고 산삼을 사 먹겠냐고, 이런 때 아니면 언제 산삼을 먹어보겠냐는 생각이 들더란다. 해서 그대로 집에 가져와 남편과 80노모, 그리고 아들 조카들까지 다 모아 식구들끼리 나누어 먹었다고 한다.
산삼 캤다는 소문이 나자 TV 방송에서 사람들이 카메라를 들고 나왔다. 그런데 산에 갈 때 입었던 옷이 아니라 꾸끔스럽게 장롱에서 옛날 어른들이 입으시던 옷을 꺼내와 연출을 하라는데 좀 불편하더라고 했다. 여하튼 방송국 기자들까지 산삼을 다 나누어 먹였다며, 산삼 캐가지고 동네방네 나누어 먹고 나니 마음이 참 편하더란다. 환하게 웃으며 얘기를 이어가는 아주머니의 얼굴이 넉넉하다.
아주머니는 산에 나물 뜯으러 가신단다, 어제도 나물 뜯어 한 방 말렸던데 “또 가세요” 하고 물으니, 요즘이 나물철이라 이 때를 놓치면 안 된단다. 그리고 오후에는 문화원에 창을 배우러 가신단다. 창이요? 하고 물으니 장구와 창을 가르치는 문화교실이 생겨 배우기 시작했는데 요즘 제법 늘었단다. 이따 오후에 시간이 되면 가보겠다고 했다.
이메일을 열어보니 이외수 소설가로부터 답장이 와 있다. 일정이 빡빡하니 다음 기회에 연락 주시라는 얘기다. 지금 지나가면 언제 또 만나러 오겠는가. 이정태씨와 함께 화천군청에 들러 담당직원을 만났다. 선생이 저녁에 글을 쓰고 새벽에 잠들기 때문에 오후에나 가능하다고 한다. 오후 4시경 방문하기로 했다.
오늘 일정은 화천읍 구경하고 문화회관에 들렀다가 이외수씨를 만나는 것으로 정했다. 차를 타고 가면서 이정태씨가 술 끊게 된 사연을 얘기한다. 몇 년 전, 아내가 갑자기 하반신 마비가 왔다고 한다. 신경성 무슨 증세라 하는데 서울 큰 병원을 비롯 용하다는 의원은 다 찾아보았는데 도무지 차도가 없었다.
마누라가 덜컥 누워버리니 앞이 노랗더란다. 생각다 못해 내가 술을 먹고 마누라 속을 얼마나 끓였으면 병이 다 났을까 싶어, 술을 끊겠다고 아내 앞에서 맹세를 했단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아내의 병이 나았다. 그 때 이후로 술을 한 모금도 하지 않는다고 했다. 거짓말 같은 참말이라며 껄껄 웃는다.
산삼을 캐 와서 팔지 않고 남편을 비롯 온 식구를 나누어 먹였다는 아내, 마누라가 아프니 평생 좋아했던 술을 끊어버린 남편, 그 아내에 그 남편이다. 두 분의 이야기가 가슴을 따뜻하게 데워준다. 서울역 지하철에서 읽었던, ‘젊어서의 사랑은 자신의 행복을 원하는 것이고 황혼의 사랑은 다른 누군가가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것’ 이라는 이야기가 생각난다.
문화회관을 방문했다. 나이 든 아주머니들이 장고와 창을 익히고 있다. 나무 바닥이 깔려있는 널찍한 교실이다. 한 쪽 벽이 유리로 되어있다. 40이나 되었을까. 젊은 여자 선생이 장고를 치면서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한 소절씩 짚어가며 선창을 하면, 학생들이 따라 부른다. 척 들어보니 선생의 장구 다루는 솜씨가 범상치 않다.
장구는 허리가 잘록해 세요고라고 한다. 세워놓고 보면 꼭 모래시계 같다. 시간을 담고 있는 본색을 드러내는 자태이다. 장구 속에 있는 무한을 흠모하는 자를 고수라 한다. 그들이 호리병 속의 시간을 꺼내 대나무 채로 재단하는 것을 박이라 한다. 그리고 잘게 부순 박 위를 걷는 것, 그것이 춤이다.
장구 소리가 들리면 노래가 나오고, 노래가 가락을 타면 춤이 나온다. 하는 사람도 보고 듣는 사람도 절로 어깨가 들썩여지고 저절로 흥이 난다. 예술이란 게 별거 아니다. 하는 사람 즐겁고 보는 사람 재미있으면 그게 바로 예술이다. 음악도 미술도 문학도 다 그렇다.
우리 가락이라 어디서건 장구소리가 들리면 저절로 흥이 난다. 꾸미지 않고 지휘하지 않아도 장단에 맞춰 흘러가다 보면 어느덧 감동의 바다에 이르게 하는 것이 국악이다. 자고로 ‘소리는 호남이요, 춤은 영남이란’ 말이 있는데, 오늘 장구에 맞춰 소리를 배우고 있는 이 강원도 아주머니들 때문에 ‘소리라면 강원도’ 라는 말이 나올지 혹 누가 알겠는가.
이정태씨과 함께 감성마을로 향했다. 모를 잔뜩 실은 차가 지나간다. 화천군에서 거처를 마련하여 이외수 소설가를 모셔왔다고 한다. 깊은 골짜기를 구불구불 돌아 올라간다. 감성마을 입구 에 돌배나무 꽃이랑 살구꽃이 화사하다.
제법 큰 2층 기와집이 눈에 들어온다. 2층은 강당이고 아래층은 숙소다. 비석 공원이 만들어져 있다. 돌에 이외수 선생의 글이 적혀있다. “나 하나의 마음이 탁해지면 / 온 우주가 탁해진다. - 이외수 장편소설, ‘황금비늘’ 중에서-. 비석이 서른 개쯤 될 성 싶다. 글씨체가 같다. 이외수 선생이 썼다고 한다
선생의 거처로 올라갔다. 수염을 덥수룩하게 기른 이외수 선생이 반갑게 맞아준다. 거실로 들어가 원목으로 만든 앉은뱅이 나무탁자를 사이에 놓고 마주 앉았다. 뒤쪽으로 긴 나무막대기에 크고 작은 붓이 걸려있는데 백여 자루는 될 성싶다.
방안 분위기가 소박하고, 주인도 편안하다. 이웃집에 놀러온 느낌이다. 이 지방을 지나면서 하마터면 선생님을 못 뵙고 갈 뻔했다고 말문을 트자 너털웃음을 웃는다. 대뜸 나이가 어떻게 되시느냐고 묻는다. 나보다 두 살이 많으시다. 그래 내가, 오늘은 초면이니 다음부터는 형님으로 모시겠다고 하니 또 털털하게 웃으신다. 두 시간 넘게 계속된 이야기는 이렇게 화기애애한 가운데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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