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클래식음악계는 요즘 ‘한국인 산사태’를 맞고 있다. 차이코프스키, 쇼팽, 퀸엘리자베스 등 권위 있는 국제콩쿠르에 한국의 젊은이들이 무더기로 진출해 각종 상을 휩쓸자 놀라움을 넘어서 경이의 눈길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어느 정도인가 하면 이 사태를 취재하러 벨기에 공영방송(RTBF)의 음악고문이 한국을 방문했을 정도다.
티에리 로로 음악고문은 한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한국 음악인들이 마치 산사태처럼 몰려와 유럽 음악계를 휩쓸자 많은 사람이 이를 불가사의라고 부르며 배경을 묻고 있다”며 이 ‘불가사의’를 캐기 위해 내년 퀸엘리자베스 콩쿠르 때 방영할 1시간짜리 한국특집 프로그램을 만들고 있다고 설명했다.
벨기에의 퀸엘리자베스 콩쿠르는 러시아의 차이코프스키, 폴란드의 쇼팽 콩쿠르와 함께 세계 3대 콩쿠르로 꼽히는 국제대회다. 로로 고문에 따르면 이 콩쿠르에는 15년 전만 해도 한국인 참가자가 거의 없었는데 2003년부터 급증해 작년과 올해 예선 진출자의 30%, 결선 진출자의 절반이 한국인이었고 당연히 입상자도 급증했다. 2년마다 열리는 작곡 부문에선 2회 연속 한국인이 우승했고, 3년마다 열리는 성악 부문에선 지난 5월 소프라노 홍혜란이 동양인 최초로 우승했다.
이것은 다른 국제대회도 마찬가지다. 지난 7월 차이코프스키 콩쿠르에서 한국인이 성악 남녀부문에서 각각 1위를 차지한 것은 물론 피아노 부문 2위와 3위, 바이올린 부문 3위 등 5명이 한꺼번에 입상해 화제가 됐었다.
로로 고문이 ‘산사태’ 취재를 위해 국제콩쿠르 50여개의 수십년 간 결선 진출자와 우승자의 국적을 조사한 결과는 더 놀랍다. 1995년 이전 주요대회 결선에 진출한 한국인은 극소수였으나 이후 16년동안 무려 378명이 결선에 진출, 60명이 1등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마치 2000년대 후반 골프계에서 박세리 키드가 쏟아져 나오며 한국여성골퍼들이 LPGA를 점령하고 있는 것과 비슷한 형국이다. 비단 음악과 골프뿐 아니라 무용, 미술, 패션 등 예술 각 분야에서 한국 젊은이들의 약진이 눈부시고, 대중문화에서도 한류의 인기는 갑자기 폭발적이다. 그야말로 우리가 보아도 ‘불가사의’라 할 만하다.
하지만 여러 예술분야 중에서도 클래식 연주자의 길은 극도로 힘들고 가파르다. 주요 콩쿠르에서 우승했다는 것이 반드시 성공으로 이어지는 것도 아니다. 100개가 넘는 국제콩쿠르가 수십년간 배출했을 수천명의 입상자 중 지금까지 세계무대에서 활약하는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 그러니 콩쿠르 근처에도 가보지 못한 99%의 연주자들은 어떻겠는가.
클래식 음악가의 진로는 크게 세가지다. 솔로이스트, 오케스트라 단원, 티칭.-모두 ‘바늘구멍’이라고들 한다.
가장 어려운 것은 당연히 독주자다. 그리고 독주자로 성공하는 데 중요한 것은 어쩌면 실력보다 ‘마케팅’이다. 좋은 매니지먼트사를 만나야 유수 오케스트라 협연이 잡히고, 그 경력을 바탕으로 연주가 이어지는 것이다. 또 거기서 만들어지는 커넥션이 중요해서 유명 지휘자가 끌어주고 밀어주면 앞길이 쉬 열리는 것은 당연하다. 여성독주자와 남자지휘자 사이에 심심찮게 생기는 가십의 배경에는 그런 내용이 없지 않다.
오케스트라 단원이 되는 것 역시 그 못지않게 힘들다. 거의 모든 오케스트라는 단원이 종신직이라 누가 은퇴하기 전에는 자리가 나지 않는 것으로 악명 높다. 나이 들어 기량이 떨어진 연주자도 자리를 보전하고 있으면 쟁쟁한 실력의 젊은 연주자들이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 어쩌다 자리가 하나 나면 수백대 일의 경쟁이 펼쳐지고, 이를 대비해 몇 년씩 오디션만 준비하는 일은 평범한 일이다.
나의 조카 하나는 한국에서부터 촉망받아온 클라리넷 주자다. 예원, 예고를 나와 예술종합대학^대학원을 마치고 USC 연주자과정, 예일대 석사와 아티스트 디플로마를 끝냈으며, 카네기 아카데미 펠로십 과정중인 그는 15군데가 넘는 오케스트라 오디션을 봤는데 아직껏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동아콩쿨 우승으로 병역면제까지 받았을 만큼 실력가인 그가 6년째 벌이고 있는 피나는 노력을 보면 한숨이 다 나온다.
이에 비하면 그래도 문이 넓은 것이 티칭이지만, 이것도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유학 끝내고 들어가면서 귀국독주회를 열어야하고, 지방대 강사부터 시작해 조금씩 인맥을 넓히며 자리를 찾아야 한다. 문제는 다들 그러기 때문에 이미 오래전부터 한국음악계는 넘쳐나는 박사들로 과포화상태라는 것이다.
99% 연주자의 길이 이렇게 험난한데도 부모들은 자녀가 조금만 재능을 보이면 제2의 새라 장, 정명훈, 조수미를 꿈꾸며 올인 한다. 1%가 되기 위한 첫 관문인 콩쿠르에 몰리는 이유다.
로로 고문의 ‘불가사의’ 특집은 어떤 내용이 될까?
< 정숙희 특집 1부 부국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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