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질감(質感)은 그 질을 드러내는 요소에 달려있다. 빛이 비췰 때 빨간 효소는 빨간색을, 파란 효소는 파란색을 보이듯이, 인생도 어떤 요소를 품느냐에 따라 자기 인생의 질감의 특성을 그대로 드러낸다.
인생을 그렇게 해석코자 할 때 그 요소 분류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 중 가장 돋보이는 것은 그것을 ‘기쁨’과 ‘슬픔’으로 나누는 것일 게다. 왜냐하면 희비(喜悲)만큼 우리의 삶의 본질을 원시적으로 잘 설명해주는 것도 없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기쁜 일만 생기길 원한다. 반면 누구든지 슬픈 일만큼은 내 것이 아니기를 바란다. 언어가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이것만큼은 만국공통어다.
그래서인지 인간은 누구나 슬픈 추억은 빨리 잊기를 원하며 기쁜 일은 오래오래 기억되길 원한다. 그래서 슬픔의 장면이 되새겨지는 시간, 자리, 인물, 그리고 그 외의 어떠한 연상 거리가 떠오르면 다들 거기서 황급히 빠져나오려고 한다. 어려울 때 줄곧 라면만 먹은 사람은 라면봉지만 봐도 구역질이 난다. 술만 먹으면 난장판을 부리던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은 술병만 봐도 가슴이 쿵쾅거린다.
하지만 항상 그런 건 아니다. 그렇다면 인생이라는 게 기쁨의 연속으로만 이뤄져야 할 텐데 알다시피 현실은 항상 그렇지 못하지 않는가. 슬픔은 항상 다른 장면으로도 내게 찾아오게 되어있다. 슬픔만큼 원치 않는 인생의 불청객도 없다. 그것을 막아보려는 나의 집요한 노력과 무관하게 슬픔은 내 인생을 수시로 방문한다. 그래서도 인생은 만들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인생을 성숙 차원에서 해석하도록 애써야 한다. 그러므로 성숙된 인생은 슬픔도, 또 슬픔과 관련된 그 어떤 것도 성숙이라는 틀 안에서 풀어나가는 인생이다.
얼마 전 어떤 글에서 ‘비키니 옷장’이라는 단어와 마주쳤다. 글의 주인공에게 전 재산은 비키니 옷장 하나밖에 없었음을 묘사하는 대목에서다. 이때 내게 연상 작용이 하나 일어났다. 아, 비키니 옷장! 아, 그거! T자 형 지퍼를 열면 달랑 봉 하나 달린 그 옷장! 그러고 보니 내게도 있었던 거였다. 그게 나의 전 재산이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자 더불어 하나가 더 떠올랐다. 그 안에 항상 담고 다니던 담요 하나다. 밍크담요였다. 안쪽은 연두색, 바깥쪽은 황갈색. 거기에 얼룩덜룩 촌스런 그림까지 있는 밍크담요. 꽃 몇 송이를 전면에 내세우고 그 뒤엔 산천을 배경으로 날아가는 학 두 마리가 그려진 밍크담요. 하여튼 되게 촌스러웠다. 하지만 그 두 개의 이삿짐. 그것은 그때 내 삶을 대표해주는 아이콘이었다.
비키니 옷장은 버렸지만 밍크담요는 결혼 뒤에도 계속 간직했다. 그리고 미국 이민 올 때까지 걔는 나를 잘 따라왔다. 그리고 추운 동부의 겨울을 나와 함께 하며 따뜻이 잘 지켜주었다. 짐이 불어나면서 그 밍크담요는 천덕꾸러기가 되었다. 볼티모어 살 때로 기억한다. 그 이불은 급기야 동네 한 교회의 도네이션 박스로 들어가 이후 누군가의 동반자가 되었을 것이다.
비키니 옷장과 밍크담요가 새삼 다시 떠오르는 것은 많이 무디어진 지금의 내 삶을 성숙이라는 세제로 다시 한 번 문질러보고 싶어서다. 내 슬픈 과거의 상징이었던 비키니 옷장과 밍크담요, 지금 소지하고 지금 덮으라면 다 없애버리고 싶은 거지만, 감사가 무뎌지고, 그럼으로써 성숙까지 더디어져가는 내 인생을 다시 세워보고 싶어서다.
비키니 옷장과 밍크담요가 이삿짐의 전부여도 행복할 때가 있었다. 그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이삿짐이 늘어나고 좋아진 지금 오히려 행복은 체감되고 있는 것 같다. 이럴 때 슬픔의 아이콘이었던 비키니 옷장과 밍크담요에 대한 연상은 큰 도움이 된다. 그것들은 나의 현재를 당연시여기지 말고 감사함으로 받으라는 하나의 부호처럼 여겨진다. 이와 같이 슬픔도, 아픔도 잘 쓰면 약이 된다. 무뎌진 나를 날카롭게 만들어주는 좋은 약이 된다. 비키니 옷장과 밍크담요가 지금 내게 그러한 것이다.
(새크라멘토 수도장로교회 담임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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