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가을엔 편지를 쓰고 싶다.
들꽃이 피어나는 이름 모를 길가에
그냥 누군가를 기다리고 싶다.
지난날 살아 오면서 이리저리 부대끼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졌나
이쁜 사람도 미운 사람도 정든 사람도
세월이 한참 지나면 언젠가는 다 같아 지는 것을
시간이 많이 지나고 나서야 나는 그 깨달음을 알수 있게 되었다.
이 가을엔 어디론가 훌쩍 떠나고 싶다.
엄마라는 이름의 자리도 내놓고 아내라는 시들한 자리도 내놓고
모든 인연의 틀에서 벗어나 그냥 소박하게 나는 그저 나만이고 싶다.
오늘 아침 가벼운 배낭 하나 짊어지고
목적지 없이 그냥 발길 가는대로 흘러가듯 가보고 싶다.
아무도 몰라보는 낯선 지역이면 더 좋을것 같다.
가다가 쉬다가 새로운 인연들을 만나 인사도 하고
날 저물면 소박한 민가에서 하룻밤 자고
나물 몇점 된장찌개로 아침을 먹고
또 발 가는대로 떠나고 싶다.
안 가본 곳은 때론 두려운 곳이기도 하지만
결국엔 우리 모두가 한번도 가보지 못한 그곳으로 흘러흘러 떠내려 가는 것은 아닌가
이 가을엔 그냥 훌쩍 떠나고 싶다.
가벼운 배낭 하나 등에 지고
찬란한 일몰을 향해
뚜벅 뚜벅 걸어 가고 싶다.
문득 자고 나니 길 모퉁이로 가을이 성큼 닥아섰다.이 가을은 여느때 보다 바쁜 가을이어서 별로 가을을 타지 않았었는데 오늘 아침 걷다 보니 가을이 바로 코 앞에 닥아 선 것을 느끼게 되었다.내가 사는 로스모어가 좋은 것은 산책길이 최상이고 또 이렇듯 아름다운 가을을 만끽할수 있기 때문이다.여기저기 길 모퉁이 마다 나무들이 붉은색과 황금색으로 옷을 갈아 입고 황홀한 단풍들이 눈을 즐겁게 한다.
그러나 한편 이 가을이 아름답기는 하지만 더 쓸쓸함을 느끼게 하는 것은 길 가 군데 군데 놓여 있는 벤치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리는 노인들을 바라볼때이다.
어느때는 차를 멈추고 어디를 가느냐고,괜찮다면 데려다 주겠노라고 하는 말이 입밖으로 나오려 하지만 그들의 자존심을 생각하면 그런 말도 쑥 들어가 버린다.저들도 한때는 차를 몰고 자신들이 가보고 싶던곳을 신나게 달려가던 시절이 있었을 것이다.그들을 바라보면서 더 세월이 가면 나도 저 자리에 그들처럼 앉아서 하염없이 버스를 기다리고 또 누군가를 기다리는 사람으로 변해 있는 날이 올것이라는 생각에 가슴이 허해지곤 한다.
이제는 나도 하루가 다르게 눈도 침침해지고 밤이나 비가 오는 날은 운전을 하기가 싫어진다.이런게 아마 늙어 간다는 것일께다.나이가 들면서 제일 처음 찾아 오는 불청객은 다리가 약해지고 힘이 빠진다고 어떤 의사가 말했다.노인의 건강은 튼튼한 다리와 힘이 느껴지는 목소리라고 한다.실제로 내 친구중 지금 몹씨 아픈 친구가 있는데 목소리가 너무 약해서 이젠 전화 통화도 힘들어진 상태다.거기 비하면 내 목소리도 짱짱하지만 우리 큰 언니는 연세가 팔십 중반인데 아직도 잘 걸으시고 음성도 힘이 있다.물론 타고난 건강도 있지만 그동안 열심히 걷고 운동을 한 덕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이층에 살고 있는 노인도 치매가 시작되었다고 한다.올해 팔십세가 된 안 노인은 아직 정정해서 수영도 하고 걷기도 한다.치매가 시작된 바깥 노인의 일거리는 매일 세시경이면 천천히 이층에서 내려와 우편물을 챙기고 쓰레기를 치우는 일이다.그들은 올해로 결혼한지 육십년이 된다고 한다.생각해 보면 육십년의 세월을 함께 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일생을 나를 돌보아 주었기 때문에 이제는 내가 돌볼 차례예요"
그의 부인 케이티의 담담한 말이다.그 말에서 노부부의 오랜 사랑이 느껴진다.
그의 비해 올해로 백세가 된 밀튼은 정신이 아직도 말짱하다.얼마전 구십 오세인 그의 아내 베티가 가벼운 자동차 사고를 내서 이제 운전은 밀튼의 몫이 되었다.밀튼은 아직도 월스트릿트 비지네스 신문도 꼼꼼히 읽고 가끔 스탠포드 대학에서 유명한 강연이 있을때는 직접 운전을 해서 그곳에 가기도 한다.오년전 까지 자신의 재산을 직접 관리했는데 이제는 젊은 금융인에게 맡겼다고 말한다.
그들 부부가 유난히 볶음밥을 좋아해서 가끔 내가 만들때마다 갖다 드리면 그렇게 좋아할수가 없다.땡큐!라고 말하면서 내볼에 뽀뽀도 해준다.그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그냥 오래 살아서가 아니라 지금도 삶을 즐기고, 스스로 그 삶의 질을 높일줄 알기 때문이다 이 가을엔 또 몇명의 노인들이 유명을 달리하고 저 세상으로 떠날지 모른다.일주일에 한번씩 이곳에서 발간되는 로스모어라는 신문이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부고란을 살펴 보는 버릇이 생겼다.
그것을 읽어 보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각자 다른 모양의 삶을 살았나 하는 것이 신기하고 흥미롭다.그 중에는 굉장히 성공한 사람도 또 평범하게 일생을 마친 사람도 많이 있다. 공통점이 있다면 거의가 팔십대 중반 이상을 살았고 구십대까지 산 사람도 많이 있다.결국 성공한 사람이나 보통의 사람이나 마지막 죽음의 길은 피해 갈수 없다는 사실이 서글픈 진실일 뿐이다.오늘 나는 이 아름다운 가을에 내가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가을의 편지를 쓰고 싶다.
이 가을엔 우리 함께 여행을 떠나요
좋아하는 친구들 몇이서 옛날 얘기 도란 도란 하면서
우리 함께 여행을 떠나요
오늘은 있어도 내일은 어떨지 모르잖아요
이 가을엔 우리 함께 여행을 떠나서 오늘만을 위해 살자구요. 이 가을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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