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째 추적추적 비가 내린다. 뜰에 나서니 나무들은 마치 검은 유령처럼 서 있고 회색 하늘은 철 지난 초록을 마지막으로 빛나게 한다. 가을비 속에 얼마 전에 만난 Y 전우의 어눌한 모습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금방 코끝이 찡해진다. 어찌해야 하나. 아무 힘도 되지 못한 채 헤어지고 나는 한동안 그 충격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분노, 억울함, 좌절, 가슴 절절하고 처절한 그 삶을 어찌 이 짧은 글에 다 옮겨 쓸 수 있으랴.
H 신문사의 J 기자가 쓴 ‘정의란!’ 글을 나는 좋아한다. 그녀는 정의를 크게 논하지 않았다. 그저 이웃을 향해 배려하는 작은 마음들이 우리의 삶에 정의가 실천되는 기틀이라는 생각을 썼고 나는 그것에 동감한다. 베트남 참전 전우들은 바로 우리의 형제요, 아버지요, 삼촌이며 이웃이다.
이제 그들이 외롭게 워싱턴에서 작은 깃발을 들고 백악관을 향한다. 베트남 참전 용사들이 오래전 열대 정글에서 함께 싸우고 지금 말 할 수 없는 고통 가운데 있는 고엽제 전우들을 위한 시위를 오는 27일 하기로 했다. 워싱턴에서는 한국 대사관과 연방 의사당 앞에서 이미 있었고 이 번이 세 번째 시위로 백악관 앞에서 생업을 뒤로 하고 초로의 전우들이 모여 시위를 벌인다.
그날, Y 전우는 참가하지 못할 것이다. 두 시간마다 약을 먹어야만 하는 그는 나와 함께 있으면서 한 움큼의 약을 입에 넣었다. 시간이 흘러 약 기운이 혈관을 통해 온몸에 퍼진 듯 그의 말이 좀 정확하게 들렸다. 한 시간 정도는 제대로 대화를 할 듯하다. 고엽제에 의한 중추 신경 장애증이다. 걸음을 잘 걷지 못하는 그는 화장실로 가는 것조차 힘들다. 옆에서 시중들며 간간이 미소 짓는 부인의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하다. 수술을 하면 70~80% 회복할 수 있다지만, 그 경비 때문에 엄두를 내지 못한다. 그 통증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가 없고 상상이 되지 않는다고 역시 베트남 전우인 한 박사님을 통해 들은 바 있다.
Y 전우는 15년 전, 1996년 LA 파동 때쯤부터 통증이 시작되었다고 한다. 계단을 오르는데 마치 귀신이 잡아당기는 것 같고 그 통증에 걸을 수가 없어 침을 맞았지만, 효과를 보지 못하고 그때부터 투병을 위해 한국과 미국을 오고 갔다. 2006년에 한국의 S 의료원에서 파킨슨병으로 진단을 받고, 그 다음에 다시 S 대학 부속 병원 J 박사님이 소개해 주신 뉴욕 C 대학 부속 병원 G 박사님으로부터 중추 신경 장애증이란 병명을 알게 되었다.
2009년 2월에 한국 국가 보훈처에서 고엽제 환자로 진단 판정을 받았지만, 바로 그 전해인 2008년에 취득한 미 시민권자라는 이유로 기각되었다. 약을 먹지 않으면 말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오래 한 곳에 않을 수도 없고, 밤에 한 자리에 누워 있을 수도 없어 2시간마다 약을 먹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정부에서는 미 시민권자라고 외면한다. 이들이 베트남 전쟁에 참여하였을 때는 분명히 한국인이었건만, 단 한 가지 이유를 내세워 차별 보상을 하는 것이다.
그의 분노와 억울함이 가슴에 사무친다. 얼마나 더 그가 지탱할 수 있을까.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하며 통증에 시달리는 남편을 지켜보기만 해야 하는 그 부인은 눈물이 마를 날이 없다. 베트남 전쟁에서 전사한 약 5,000여 명의 용사들의 가족에게 한국 정부는 과연 어떤 보상을 주었는가? 인터넷에서 한국에 있는 고엽제 환자 미망인들이 보훈처에 찾아가 호소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남편이 죽으면 그나마 보내오던 수당도 끊겨 삶이 더 척박해진 미망인들이 눈물로 한국 정부에 계속 호소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 정부는 그들로부터 철저히 등을 돌리고 있다. 무정하여라. 애통하여라.
이제 초로에 들어선 용사들이 동료 전우들과 그 가족들을 위해 발 벗고 궐기하여 온 세계에 한국정부의 비인도적이고 무정함을 알리고 미국 정부에 도움을 호소한다. 백악관 앞에서 미국의 국부인 오바마 대통령께 편지를 보내며 절규한다. 버려진 베트남 참전 전우들을 제발 외면하지 말고 도움의 손길로 일으켜 달라고.
박현숙
워싱턴문인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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