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바람이다. 나뭇가지에서 새싹이 움트듯 인생도 그렇게 시작하기에 피할 수 없는 것이 바람이다. 보드라운 어린 잎은 무심코 떨어지는 소나기에도 멍이 들고, 별 생각 없이 스치는 바람에도 파르르 떤다. 떨고 있는 잎을 안아주고 멍든 자국 가만가만 닦아주는 햇빛에 기대며 어린 잎은 다시 미소를 찾는다. 잎이 바람을 피할 수 없듯, 인생은 시련과 역경을 피해 갈 수 없다.
시장에서 건어물과 고춧가루를 긴 자판대에 올려놓고 팔던 아주머니가 있었다. 그 재래식 시장에서 인생의 대부분을 보낸 분이라 자리도 널찍하고 눈과 비를 피할 수 있는 판자 지붕도 있었다. 나이 오십 중반을 넘어서고 있으면서도 얼굴에는 꼭 그어져야 될 굵은 주름만 있을 뿐, 마음의 애끓음으로 생겨난 주름은 없었다. 아무리 까다로운 손님이라도 그녀 앞에서는 공손할 수밖에 없는 품위가 흐르고 있었다. 그 누구에게라도 말을 가볍게 하는 법도 없었다. 살이 적당히 오른 얼굴에 도톰하게 처진 귓불은 마치 그녀의 생각을 잘 조정해 주고 있는 듯 보였다. 웃음도 크게 웃지 않았지만 얼굴에는 미소의 빛줄기가 떠나질 않았다.
그녀는 세월의 바람에도 흔들림 없이 비녀로 쪽을 찌고 살았다. 약간 동그스름한 얼굴에 깔끔하게 빗어 넘긴 반곱술 머리는 언제나 단정했다.
그런 그녀의 반듯한 외모 때문이었을까, 그녀의 상품에는 신뢰가 담겨 있었다. 자판대 위에는 종류별 멸치가 대중소로 구별된 나무 됫박에 히말라야 산봉우리처럼 가파르게 쌓여 있었다. 그렇게 쌓여 있는 멸치는 유난히 맑은 물에서 놀다가 잡혀온 듯 신선한 빛이 자르르 흘렀다.
그 옆에는 낮잠을 자다가 나온 듯 머리가 부스스하고 얼굴에는 자신의 성깔로 인해 깨작깨작한 주름으로 엉킨 여인이 같은 상품을 팔고 있었다. 아마도 장사가 잘 되는 이의 옆에서 떨어지는 콩고물이라도 얻어먹자는 속셈이었는지 모른다.
주름투성인 여인의 멸치는 눈빛도 흐리멍덩하고 생김도 바르지 못했다. 그렇게 못생긴 멸치들이 양은 접시 위에 올려 있었다. 그 양은 접시에 올린 멸치의 부피가 꽤 많아 보였지만, 실은 양은 뚜껑 밑바닥이 복어 배마냥 불룩 올라와 있어서 양이 많아 보일 뿐이었다. 그래서인지 그 후덕한 아주머니의 자판대 앞에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그렇게 후덕한 아주머니에게 갓 일곱 살 난 남자 아이가 종종 찾아와 품에 안기곤 했다. 그 아이는 바로 건너편에서 야채를 팔고 있던 아낙의 막내 아들이었다. 그 남자 아이가 후덕한 아주머니를 큰엄마라고 불렀다. 큰엄마는 그 남자 아이에게 정성을 다했다. 그 남자 아이의 아버지는 그 큰엄마의 남편이었다.
그 후덕한 아주머니에게는 자식이 없었다. 남편은 후손을 얻기 위해 그 남자 아이의 엄마를 택했다. 바로 마주 보는 곳에서 남편은 작은댁을 들락거렸다. 남편이 신발을 벗고 작은 부인의 방문을 올라서는 그 뒷모습을 바라봐야 하는 부인의 마음은 어땠을까. 자신이 불임이라는 강풍에 맞았을 때 그 아픔 또 어떠했을까. 괜찮다고 남편의 등을 떠밀어 줘야만했던 그 심정은 밀려드는 쓰나미에 산산조각이 나진 않았을까.
그 후덕한 아주머니는 바람 분 다음 날의 모습이었다. 바람 분 다음 날의 하늘은 침착하기 그지없다. 바다의 파란 물로 곱게 단장하고 나선 하늘의 모습. 그 모습에 구름도 얼씬거리지 못한다.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새들도 그 평온함에 도취되어 날기를 주저한다.
사는 동안 단 한 점의 바람도 맞지 않았으리라 생각해 온 그 후덕한 아주머니의 뒷이야기를 들은 후, 그 분의 성정에 대한 생각을 늘 하며 살아왔다.
인생의 어느 골목에서 강풍으로 인해 찢겨진 옷자락을 부여잡고서도, 망망대해에서 표류하는 듯한 처지에 대해 두려움으로 떨고 있을 때도, 불빛도 없는 깜깜한 터널에서 그 끝이 어딘지도 모르고 더듬거리며 앞으로 나아갈 때도, 허기지고 지친 내 앞에 놓인 유혹의 성찬 앞에서도 그 아주머니를 생각했다. 바람에 대한 분노나 원망을 간직하지 않고 떠나 보내버린 그 얼굴을.
어느 날, 그 얼굴은 나에게 말해 주었다. ‘인생은 바람이고, 바람은 머물지 않는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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