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방대법원의 새 회기가 ‘조용히’ 시작되었다. 그러나 3일 개정해 내년 6월말 폐정할 2011~2012년 회기의 끝은 시작과 달리 결코 평온할 듯싶지는 않다. 뜨거운 정치바람에 휘말릴 가능성이 다분하다. 지난 한 해 미국의 국론을 양분시켜온 시한폭탄 - 오바마의 헬스케어개혁법과 애리조나의 불법이민단속법을 비롯한 핫 이슈들이 연방대법의 위헌여부 판결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정계 뿐 아니라 일반 여론까지 보수와 진보로 팽팽히 맞서 충돌하고 있는 이들 이슈는 단순히 법적 해석을 넘어 국가의 통치방향을 결정할 보다 근본적인 문제여서 앞으로 몇 달 미국의 각계각층은 우려 반 기대 반으로 대법원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못할 것이다.
60여건 이상 심리할 이번 회기에도 흥미로운 케이스들이 많다 : 법원의 사전 승인 없이 마약밀매자의 차량에 GPS(위치추적기)를 설치한 경찰의 용의자 추적은 사생할 침해인가 - 디지털 시대의 새로운 판례가 될 것이다. 여성의 엉덩이를 노출한 TV드라마나 스타들이 욕설을 내뱉는 쇼프로에 대한 연방통신위(FCC)의 규제는 표현의 자유를 침해한 위헌인가 - 주요 방송사들과 정부권한의 대결로 지난 회기 상당수 판결에서 대기업 편에 섰던 대법원이 이번엔 어떤 결정을 내릴지…변호사가 아무 연락 없이 직장을 옮기는 바람에 우편물이 되돌아와 재심청구 마감일을 놓친 사형수에게 새로운 기회가 허용될 수 있는가 - 평소 사형수의 어필에 상당히 회의적이었던 새무얼 얼리토 대법관 마저 심리 첫날 의외로 동정적 태도를 보여 결과가 더욱 궁금해진다.
애리조나 이민단속법 소송은 우리에겐 특히 관심이 가는 케이스다. 주정부와 지역경찰에게 불법이민 체포권을 허용하는 SB1070은 초강경 이민단속법안으로 연방지법과 항소법원에서 잠정 시행중단 명령을 받은 상태다. 그런데 지난 주 앨라배마 주의 유사한 단속법에 대해 한 연방지법이 ‘위헌이 아니다’란 판결을 내렸다. 하급법원들이 같은 내용에 대해 상반된 판결을 내렸으니 이제 대법원이 교통정리를 해 줄 차례다.
대법원의 판결을 기다리는 이민사회의 마음은 편치가 않다. 지난해 대법원은 불법이민 고용업체의 면허를 취소시키는 애리조나 이민법에 5대3으로 합헌 판결을 내린바 있다. 그 5명 보수 대법관들이 SB1070도 합헌으로 선언하면 어떻게 될 것인가…미 전국의 지역 정부에서 초강경 단속법안들이 쇄도할 것은 불 보듯 훤한 일이다.
판결의 파장이 한층 강력할 사안은 역시 헬스케어개혁법이다. 지난 주 오바마 행정부는 대법원에 이 법에 대한 합헌성 여부 심리를 요청했다. 보수 성향 강한 대법원의 이념지형을 감안하면 백악관의 결정은 의외다 싶다. 그만큼 자신 있어 담대한 것인지, 무모한 승부수인지 헷갈린다는 전문가들도 상당수다.
사실 대법원은 아직 헬스케어법 심리를 확정하지도 않았지만 이변이 없는 한 다루게 될 것이라고 전문가들은 예상한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최종판결이 나올 시기가 대선전이 뜨겁게 달아오를 내년 6월말이다. 원하든 원치않든 연방대법원이 그 정치폭풍의 한 복판에 뛰어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헬스케어개혁법은 지난해 3월 통과된 직후부터 끊임없는 도전의 대상이 되어왔다. 연방항소법원마다 결과가 다르다. 전체법안 합헌 판결도 있고 개인 의무적 보험가입조항에 대한 위헌 판결도 있다. 마무리는 역시 대법원의 몫이다.
전국민의 의료보험 혜택을 위한 헬스케어개혁법은 본질적으로는 이견의 여지가 없어야 할 기본권 보장이라 할 수 있지만 ‘오바마케어’는 태생부터 민주·공화 양당이 첨예하게 대립해온 정치적 사안이었다. 그러므로 대법원에서 어떤 판결이 나오든 정치적 파장은 피하기 힘들 것이다.
백악관이 자신하는 대로 합헌판결이 나올 경우 헬스케어를 최대 업적으로 자부해온 오바마에겐 큰 힘이 될 것이다. 정치 논쟁을 넘어 법의 세부시행을 위한 절차에 착수하게 되며 세부사항 대부분은 지지도가 높아 캠페인에도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한편 더욱 거센 반대를 불러 역풍을 맞을 수도 있다. ‘개혁법 폐지의 유일한 방법은 공화당 대통령 선출’이라는 티파티의 구호가 공화당 표밭을 깨우는 동력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위헌판결이 나온다면 리버럴 진영은 보수 대법관들이 정치에 뛰어든 ‘사법부의 액티비즘’이라고 거센 비판을 쏟아낼 것이며 오바마는 대법원과의 일전을 불사할 것이다. 지난 주 오바마 행정부는 성명을 통해 선언했다 : “지난 역사에도 소셜시큐리티법, 민권법, 투표권법 등 획기적 입법에 대한 유사한 도전들이 있었다. 그러나 모두 실패했다. 우리는 헬스케어개혁법에 대한 도전도 결국 실패하고 대법원은 이법에 합헌 판결을 내릴 것으로 믿는다”
선거를 앞둔 회기에선 보통 이념으로 양분되지 않고 될수록 만장일치나 7대2 정도의 안정된 판결을 내놓는 것이 연방대법원의 전통이었다. 대법원 자체가 선거이슈로 부각되지 않도록 자제한 것이다. 그것은 또 존 로버츠 대법원장이 인준청문회에서부터 거듭 강조해온 대법원의 참 모습이었다. 미 전국이 양극화로 치닫고 있는 와중에서 대법원은 과연 언제까지 그 품위를 유지할 수 있을까. 시한폭탄을 건네받은 로버츠 대법원장의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박 록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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