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각가 베노네 올라루(Benone Olaru)
2004년 겨울 필자의 연구실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이탈리아에서 활동 중인 루마니아 조각가 베노네는 주한 루마니아 대사관을 통해 한국외국어대학교에 루마니아어과가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작정 필자를 찾아온 것이다.
첫 만남이었지만 어색함은 없었고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Buonarroti)와 로댕(Auguste Rodin) 그리고 브랑쿠시(Constantin Brancusi)등 세계 조각예술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이어갔다.
동갑이라서 그랬는지 아니면 서로 뭔가 통했는지 이야기는 상당히 길어졌고 저녁 무렵 다시 만나자는 아무런 약속도 없이 그냥 헤어졌다. 그런데 다음날 오전 베노네는 하얀 도화지에다 뭔가 스케치한 것을 한 장 들고 연구실로 다시 찾아왔다. “만약 조각에 필요한 나무와 조각 공구를 준비해 준다면 루마니아어과 학생들을 위해 자신의 작품을 외대 캠퍼스에 남기고 싶다”는 것이었다. 뜻밖의 제안이었다.
베노네는 루마니아 부카레스트(Bucharest) 대학교 조소과를 수석으로 졸업한 수재였다. 졸업 직전 학과 교수들이 그를 후임교수로 점지했지만 대개 천재 예술가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는 눈앞의 영광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오히려 대학 졸업장을 받기도 전에 이탈리아로 떠나버렸다. 그가 도착한 곳은 카라라(Carrara). 대리석이 풍부해 전 세계의 전도유망한 젊은 조각가들이 모여드는 곳이었다.
그가 필자를 찾았을 때는 이미 10년 이상 카라라에서 대리석 조각술을 연마한 상태였고 그의 주옥같은 작품은 이미 바티칸 박물관에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한 것은 물론 밀라노 등 이탈리아 여러 도시의 주요 광장에 설치되었다. 하지만 그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다. 당시 그가 한국을 방문한 목적은 돌중에서 가장 단단한 화강암을 자유자재로 조각하는 한국의 석공들에게서 비법을 배우기 위해서였다. 석굴암과 다보탑, 석가탑 등을 비롯해 우리나라의 묘지 앞에 있는 돌 조각품이나 묘비 등이 대개 화강암으로 만든 것이다.
며칠 동안 그와 함께 조각 재료와 공구를 구입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녔다. 하지만 나무를 구입하는 것이 문제였다. 가능하다면 소나무나 밤나무가 좋다고 말했지만 소나무 가격이 그렇게 비쌀 줄은 전혀 생각지 못했다. 수목원 주인은 지름 1m정도 되는 소나무는 우리나라에 있지도 않을뿐더러 설령 있다 하더라도 부르는 게 가격일 거라 했다. 또한 그 정도의 소나무는 중국에서도 수입하기 힘들 거라 했다. 결국 베노네와 상의한 끝에 인천에 있는 참나무(oak tree)를 구입하기로 하였다. 길이 6m에 지름이 1m가 넘는 거목(巨木)이었다.
며칠 후 오크나무를 실은 트럭이 캠퍼스에 도착했다. 베노네는 잠시 나무에게 인사를 하고 무언의 대화를 나누더니 나이테를 세어보고는 족히 100살이 넘을 거라 했다.
이윽고 작업이 시작되었고 나무를 자르는 전기톱소리가 캠퍼스 내에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지나가던 학생들도 무슨 일인가 하고 하나 둘 모여들었다. 하지만 날씨가 너무 추워 어려움이 많았다. 나름대로는 거든다고 옆에서 하루 종일 서있기도 했지만 영하 10도가 넘는 추위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하지만 베노네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묵묵히 작업에만 집중하였다. 이런 그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거대한 작품이 탄생하는 매 순간마다 환희와 경외감이 느껴졌다.
마침내 작품이 완성되었다. 베노네는 세계적인 조각가 브랑쿠시의 대표작인 ‘무한의 기둥(The Endless Column)’을 기초로 하여 루마니아 전통문양을 작품 속에 묘사하였고, 작품 이름도 그 뜻을 이어 ‘한국의 무한의 기둥’으로 지었다.
작품이 완성되었지만 대학 캠퍼스 내에 설치하기 위해서는 학교 당국의 허가가 필요했고 또 작품을 지지하는 돌로 된 지지대도 따로 제작해야 했다. 결국 재정적인 이유로 이 작품은 근 3년 동안 빛을 보지 못하고 캠퍼스 내 한 구석에 방치되었다.
2007년 루마니아어과는 설립 20주년을 맞이하였다. 당시 학과장이었던 필자는 각종 행사를 거행하기 위해 모금운동을 벌였고 졸업생들에게 무한의 기둥에 대한 이야기를 하며 도움을 청했다.
졸업생들 덕분에 현재 ‘한국의 무한의 기둥(높이 8m, 무게 약 33톤)’은 한국외국어대학교 글로벌캠퍼스 내에 있는 아름다운 호수가에서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 그 위용을 자랑하고 있으며 보는 학생들에게 앞으로 펼쳐질 무한한 꿈과 희망을 이야기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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