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찬열의 최전방 지역 도보횡단>
▶ <3> 백담사
백담사는 만해 한용운의 유적지이면서, 전두환 전 대통령이 머물렀던 현대사의 굴곡을 간직하고 있는 고찰이다.
“만해 정신 숨 쉬는 곳, 전두환은 어떤 생각을…”
빛깔 고운 옥수수로 만든 생동동주 맛이 일품
백담사를 방문할 차례다. 백담사를 왕래하는 마을버스를 탔다. 버스 편도요금이 성인 2,000원, 학생 1,000원이다. 가는 길이 절벽을 따라 구불구불 험하다. 자동차 한 대가 비켜가지 못할 만큼 길이 좁다. 좀 넓은 모퉁이 길에서 기다렸다가 서로 비켜간다. 30분 정도 걸렸을까.
백담사 입구에 도착했다. 백담사. 서기 647년에 지은 절이다. 만해 한용운의 유적지로 유명하다.
넓은 냇가를 건너 산 밑에 백담사가 있다. 다리 이름이 수심교다. 다리를 건너며 마음을 닦으라는 의미인가 싶다. 길이가 백 미터쯤 되어 보인다. 늙은 어머니를 부축하여 모시고 가는 덜 늙은 며느리의 모습이 아름답다.
넓은 냇가에 물에 씻긴 돌이 가득하다. 곳곳에 돌멩이를 쌓아 작은 탑들을 만들어 놓았다. 무엇을 빌면서 돌탑을 쌓았을까. 비가 내리면 다 쓸려가 버릴 것들이다. 헛되고 헛된 짓인 줄 알면서도 사람들은 저렇게 탑을 쌓는다.
보이는 곳이건 보이지 않는 곳이건 높디높은 탑을 짓는다. 절 문 앞에 도착도 하기 전에 다리를 건너는 사람들을 향해 돌탑들이 화두를 건네주고 있다. 다리에서 물이 흘러오는 쪽을 바라보니 첩첩이 산이다.
경내에 들어갔다. 만해 기념관 앞에 동상이 서있다. 기념관 벽 여기저기 시가 걸려 있다. 잘 알려진 시. “님은 갔습니다. 아아, 나의 사랑하는 님은 갔습니다…”로 시작하는 ‘님의 침묵’이 큰 액자에 걸려 있다. ‘조선 청년에게’라는 글도 보이고, “보석을 요구하지 마라, 사식을 취하지 마라, 변호사를 대지 마라”는 옥중 투쟁 3대 원칙도 벽에 걸려 있다.
전두환 전 대통령이 유배되어 살다 나온 집에 산돼지 한 마리가 진을 치고 살고 있다는 말을 백담사 입구에서 어떤 분으로부터 들었다. 전 주인을 대신하여 산돼지가 집을 차지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심산유곡에 해가 뜨고 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백담 계곡 물소리와 달빛 내려앉은 수심교 다리를 보면서, 그리고 만해 선생을 매일 만나면서 그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냇가를 따라 절 여기저기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무작정 / 앞만 보고 가지 마라 / 절벽에 막힌 강물은 / 뒤로 돌아 전진한다 / 조급히 서두르지 마라 / 폭포 속의 격류도 / 소에선 쉴 줄을 안다 / 무심한 강물이 영원에 / 이른다 / 텅 빈 마음이 충만에 / 이른다” 오세영 시인의 ‘강물’이라는 시다. 최근에 세워진 듯한 고은 시인이 쓴 ‘그 꽃’이라는 시도 보인다. “내려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보지 못한 / 그 꽃”
날렵하게 치켜 올라간 절집 처마 끝에 작은 종이 달려 있다. 풍경이다. 바람이 불 때마다 ‘뎅그렁, 뎅그렁’ 소리를 낸다. 풍경은 어느 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인가를 시비하지 않는다. 바람을 받아 온 몸으로 소리를 낼 뿐이다. 온 힘을 다해 울려 퍼지는 종소리를 들으면서, 나도 온 몸을 열어 소리를 받는다. 풍경이 전해주는 이야기를 알아들을 수 있을 것 같다.
이경진씨로부터 전화가 왔다. 서둘러 백담사를 나왔다.
기다리고 있던 그와 함께 식당에 들어갔다. 황태국, 황태구이, 두릅 등, 이름 모를 봄나물과 지역 특산물이 한 상 가득이다. 옥수수로 만든 생동동주가 반주로 나왔다. 빛깔이 노랗다. 한 잔씩 돌아가는데 맛이 일품이다. 이 지역이 감자나 옥수수로 연명하던 곳이었는데 80년대 와서 본격적으로 황태를 개발하여 상전벽해가 된 셈이라고 한다.
휴전선이 생기면서 강원도 일부가 이북에 속하게 되었다. 솔잎흑파리 병을 공동구제하는 일을 비롯, 강원도끼리 협력할 수 있는 방안을 오래 전부터 모색해 오고 있다고 한다. 이 일에 대한 자세한 얘기를 들을 수 있을 거라며 생명평화동단 정성헌 이사장을 소개해 준다. 전화를 걸어놓겠다며 마침 걸어가는 길목이니 들러서 자고 가라며 오늘 저녁 숙소까지 마련해 주신다. 책 한 권을 건네준다. 본인이 쓴, ‘어느 시골 면장의 세상 이야기’다.
점심대접을 넘치게 받았다. 다시 걷기 시작한다. 부지런히 걸어야 해 떨어지기 전에 평화동산까지 걸어갈 수 있겠다.
용대터널을 지난다. 터널이 둘이다. 하나는 953미터 하나는 654미터. 터널을
지나는 동안 자동차가 만드는 먼지와 소음으로 목이 컬컬하고 귀가 멍멍하다. 멀더라도 구 도로를 따라 걸어갈 걸 그랬다.
원통에 도착했다. 할머니 한 분이 길가에 자리를 펴고 나물을 삶아서 말리고 계신다. 무슨 나물이냐고 물었더니, 망칫대 나물이란다. 망칫대 나물? 잘 모르겠다.
원통.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네’ 군인 간 남정네들이 흔히들 얘기하던, 그곳이다.
행적구역은 인제군 북면 원통리다. 인제군은 전국 기초단체 중에서 두 번째로 큰 면적을 가지고 있다. 제주도 면적과 비슷할 정도로 광활하다. 휴전선에 인접해 있어 군부대가 많은 곳이다. 대한민국 남자 30% 이상이 인제군에서 병영생활을 경험한다는 얘기를 들었다.
인제는 시인 박인환, 소설가 한수산의 고향이다. 박인환을 기억하는 분이 많을 것이다. 이름은 잘 몰라도 그 유명한 “세월이 가면”이라는 노래는 웬만한 사람이면 기억에 남아있을 성 싶다.
노래를 다 기억하지 못해도 한 소절쯤은 귓전에 남아 따라 부를 수 있을 것이다. 20, 30대 청춘시절, 나는 이 노래를 즐겨 불렀다. 술이라도 한 잔 들어가면 감상에 잠겨 부르곤 했다. 느리게, 천천히 불러야 제 맛이 나는 노래였다. 다 부른 다음에도 “사랑은 가고…”부터 한 번 더 불러야 끝나던 노래였다.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바람이 불고 / 비가 올 때도 / 나는 저 유리창 밖 / 가로등 그늘의 밤을 잊지 못하네 // 사랑은 가고 / 과거는 남는 것 / 여름날의 호숫가 / 가을의 공원 / 그 벤치 위에 / 나뭇잎은 떨어지고 / 나뭇잎은 흙이 되고 / 나뭇잎에 덮여 / 우리의 사랑이 사라진다 해도 //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 / 그의 눈동자 입술은 / 내 가슴에 있네 / 내 서늘한 가슴에 있네 ”
박인환 시인은 이 노래를 1956년에 지었다. 강계순이 쓴 박인환 평전에 의하면 그 해 이른 봄 저녁 명동에 있는 ‘은성’이라는 술집에서 박인환, 이진섭, 송지영, 영화배우 나애심이 모여 앉아 술을 마시고 있었다. 은성은 배우 최불암의 어머니가 운영하던 술집이었다.
술이 몇 차례 돌아가자 그들은 나애심에게 노래를 부르라고 졸랐지만 그녀는 좀체 부르지 않았다. 그때 박인환이 즉석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그 시를 넘겨다보고 있던 이진섭이 즉석에서 작곡을 하고 나애심은 흥얼흥얼 콧노래로 그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한 두 시간 후 나애심과 송지영은 돌아가고 임만섭, 이봉구 등이 합석을 했다. 테너 임만섭이 그 우렁찬 성량과 미성으로 이 노래를 다듬어서 불러, 길가는 행인들이 유리창이 깨진 목로주점 같은 초라한 이 술집 문 앞으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이 시는 망우리에 묻혀 있는 그의 애인을 회상하며 쓴 글이라 했다. 전쟁이 휩쓸고 간 도시의 황폐함과 상실의 아픔, 그리고 따뜻한 인간애와 사랑에 대한 추억과 목마름을 담고 있다. 그는 서른한 살에 요절했다.
해가 설핏하다. 오늘 더 이상 걷는 건 무리다. 이경진씨가 소개해 준 천도리 이장에게 전화를 했다. 고맙게도 차를 가지고 나오겠단다. ‘한국 DMZ 평화생명동산’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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