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레는 여러모로 특이한 나라다. 우선 남미의 최남단에서 적도 근처까지 이어지는 길고 긴 나라 모양이 그렇다. 남북 길이는 장장 2,700마일에 달하지만 동서 폭은 평균 100마일에 불과하다. 이런 이상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칠레는 현재 남미 최고의 선진국이다. 1인당 국민소득도 그렇고 인간 개발 지수도 1위다. 정부 청렴도도 1위, 언론 자유, 경제적 자유, 민주주의 성숙도 모두 최고다.
이 나라는 또 남미에서 유일하게 2명이나 노벨 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한 나라다. 1945년 시인 가브리엘라 미스트랄이 남미에서 처음으로 노벨 문학상을 탄 데 이어 1971년에는 시인 파블로 네루다가 또 노벨상을 받았다. ‘시인의 나라’라는 별명이 괜히 붙은 게 아니다.
남미 유일의 OECD 가입국인 이 나라가 언제나 이렇게 잘 살던 것은 아니다. 1970년 이 나라는 인류 사상 처음 자유선거를 통해 공산주의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했다. 살바도르 아옌데가 그 사람이다. 그는 당선되자마자 광산과 금융 기관을 몰수하고 실업자 구제를 위해 광범위한 국가사업을 벌였다. 일시적으로는 효과를 거두는 듯싶던 이 정책은 곧 엄청난 재정 적자를 불러왔다. 아옌데 정부는 돈을 찍어 이 문제를 해결하려 했으나 살인적인 인플레만 초래했다. 돈 있는 사람은 해외로 빼돌리기에, 기업들은 문 닫기에 바빴다. 고실업에 하이퍼 인플레가 겹치면서 경제는 파업으로 마비됐고 사회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1973년 이런 상황에서 쿠데타가 터졌다. 아옌데는 대통령 관저에 있다 칠레 공군기의 폭격을 받고 자살했다. 이렇게 집권한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장군은 무자비한 탄압 정치를 펼쳐 3,000명이 넘는 시민이 살해되거나 실종되고 수많은 사람이 체포, 구금, 고문당했다. 그럼에도 그는 파탄 난 칠레 경제를 살폈다. 그는 시장주의자 밀튼 프리드먼의 가르침을 신봉하는 시카고 대학 출신 소위 ‘시카고 보이즈’를 기용, 시장 친화적인 정책을 폈다. 긴축 정책의 결과 인플레는 잡혔고 투자 이익을 보장하면서 빠져나갔던 돈들이 돌아왔다. 이를 기반으로 칠레 산업은 부흥하기 시작했다.
그가 이룩한 주요 업적의 하나는 연금 개혁이다. 1980년 이전까지 칠레의 연금제도는 지금 미국과 같이 근로자가 낸 세금으로 은퇴자를 먹여 살리는 ‘그날 벌어 그날 먹는’(pay as you go) 제도였다. 그러던 것을 봉급의 일정액을 떼어내 국가가 감독하지만 개개인이 선택하는 연금 관리 기금에 넣도록 했다. 이 기금은 우량주나 채권에 투자해 수익을 올리고 20년이 지나면 매달 일정액을 연금으로 준다.
이 돈은 국가 돈이 아니라 개인 것이기 때문에 본인이 원한다면 자선 단체에 기부할 수도 있고 자식에게 물려 줄 수도 있다. 이렇게 마련된 연기금은 기업들이 자금을 조달하는 것을 쉽게 해 투자와 고용을 늘린다. 전 세계 대부분의 선진국이 연기금이 바닥날 것을 걱정하지만 칠레 국민들은 오히려 이를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활용하고 있다. 칠레에서도 미국식 연금제를 택할 수 있지만 국민들의 90%는 세 제도를 선택한다.
릭 페리 주지사의 “소셜 시큐리티는 ‘폰지 사기극’” 발언 이후 이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지를 놓고 여러 방안이 나오고 있다. 그 최선의 방책은 극빈자를 제외한 대다수 국민의 경우 자기 노후는 일찍부터 자기가 책임지는 쪽으로 바꾸는 것이다. 모든 국민에게 이를 강요할 필요도 없다. 칠레 식으로 이쪽이냐 저쪽이냐 선택권만 주면 된다. 시간이 지나면 어느 쪽이 유리한가는 분명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현행 미 소셜 시큐리티 제도는 65세까지 실컷 돈을 붓다가 받기 시작한 다음날 본인이 죽으면 그걸로 끝이다. 원래 자기 돈이 아니기 때문에 정부가 규칙을 바꾸면 70세부터 받을 수도, 예정된 액수의 절반밖에 못 받을 수도 있다. 모처럼 찾아온 기회를 전처럼 수혜 연령을 조금 높이고 연 증가분을 좀 줄이고 하는 땜빵식 처방으로 날리지 말고 연기금을 미국의 장래를 위협하는 걸림돌이 아니라 경제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한 때다.
민 경 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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