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여름 자주 내린 비에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수목(樹木)들이 이슬을 머금으니 내 마음도 풍요롭다.
일과가 된 조기 기상, 뒤뜰로 내려간다. 허리케인 아이린(Irene)이 남기고 간 뒤치다꺼리를 하기 위해서다. 천천히 걸어가며 부러진 가지도 줍고, 생각하며 하늘을 쳐다본다. 항상 얕은 호흡 탓에 부족하기 쉬운 산소를, 이 기회에 복식호흡으로 포도알 같은 폐포(肺胞) 하나하나에까지 산소를 공급해준다. 땀방울이 송송 맺히면 앞뜰로 올라와 가을 전지(剪枝)를 시작한다. 사마귀, 여치는 키가 큰 수목 속으로 몸을 숨기고, 고독한 귀뚜라미는 짝을 찾겠다고 청명(淸明)하게 울다가 나의 가위 소리에 놀라 못마땅한 듯 울음을 그친다.
벌써 9월이구나. 이 맘 때면 우리 시대의 가수 유주용이 부르던 ‘컴 셉템버(Come September)’가 듣고 싶다. 부득이 넓은 곳에 심어지지 못하고 벽돌을 뒤로 하고 심어진 나의 코스모스는 워터 쇼크(Water Shock, 너무 물을 자주 줌으로)에 빠졌다. 의심할 정도로 꽃망울은 별로 보이지 않고 키만 껑충하고 잎이 무성하다. 잎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옆으로 비스듬히 눕는다. 부러지면 어쩌나 바로 세우려고 하니 굵은 대 하나가 바삭 하며 부러졌다. 너무 아까워 항상 빗물이 가득한 깊은 항아리 속으로 풍덩 던져 놓았다. 그리고 적당한 크기의 나뭇가지를 주워 네모꼴로 버팀목을 만들어 주었다.
원래 코스모스는 햇빛을 잘 받을 수 있는 확 트인 들판, 빗물 충분하고 바람이 사방팔방으로 잘 통하며 춤을 추듯, 속삭이듯 자장가를 몸으로 부르듯 하늘거리며 운집해 피어 있으면 제격이다. 작년에 뒤뜰 한 옆 기다란 곳을 골라 코스모스를 심었더니 꽃도 피우기 전 사슴의 애피타이저(appetizer)로 사라졌다. 오늘도 일과의 하나인 탁구 치러 가기 위해 나는 한 발 먼저 나가서 기다리는데, 남편이 깜박 잊고 열쇠를 방안에 두고 방문을 잠그고 나왔다. 방안의 열쇠를 어떤 방법으로 꺼내 와야 하나.
그러나 궁하면 통한다고 창문을 통해 들어가면 되지 않은가. 밝은 날이니 이웃이 보더라도 도둑으로 오인, 경찰에 신고하지는 않을 것이다. 허리케인 아이린 때문에 창문마다 꼭꼭 잠그고 다녔는데 그날따라 한가운데 창문을 열어놓고 나가서 다행이었다.
사다리를 가지고 나와서 서로 올라가겠다고 옥신각신 하다가 결국 남편이 올라갔다. 코스모스가 심어진 곳 한가운데에 사다리가 놓여졌다. 나는 아래서 어깨와 전신의 힘으로 사다리를 받치고 또 한 손으로 남편의 발에 짓밟히는 코스모스를 옆으로 치우기 바쁘다. 올라가다가 떨어지면 코스모스는 쑥대밭이 되고 골절이라도 생기면 어쩌나, 짧은 동안 걱정이 뭉게구름 같다. 차라리 내가 올라가서 여차하면 사다리 발로 차 버리고 조금 거리가 있지만 잔디가 있는 곳으로 뛰어내리면 되니까. 남편보다 체중이 약간 가벼우니 나는 자신이 있었다.
올라간 남편은 윈도우 스크린(window screen) 떼어내느라 약간 고생은 했지만 열린 들창으로 쉽게 들어갔다. 탈 없이 들어간 것은 좋은데, 열쇠 가지고 사다리가 걸려 있는 쪽으로 나오겠지 하고 기다리고 있는데 유유히 현관으로 나와서 의기양양하게 “갑시다” 한다.
그 다음날 윈도우 스크린은 달았으나 망사에 손가락 자국이 세 개나 났다. 이틀 작업으로 코스모스 상처가 많다. 더욱 손상 받은 어제의 것은 말라있어 손으로 떼어 내려하니 생각보다 질기다. 그냥 두자니 아열대 식물에 기생하는 스페니쉬 모스(spanish moss)처럼 보기가 싫다. 아직도 일이 많이 남았다. 기울어진 받침목을 땅 속 깊이 박아 넣고 옆으로 반 넘어가고 있는 코스모스 중심대를 바로 세워 주었다.
이틀에 걸쳐 짓밟힌 흙, 호미로 땅을 고르고 빗물 잘 스며들게 작은 고랑도 만들어주었다.
이제 마지막 작업만 남았다. 무심코 항아리에 던져 놓았던 코스모스를 건져 보니 숙주나물 같은 깨끗한 뿌리가 양 사방으로 싱싱하게 뻗어 있다. 부러졌어도 곧 처치를 하니 씨 뿌린 것 못지않게 잘 자랄 수 있구나.
사람은 왜 코스모스처럼 아름답게 재생하지 못하는가. 물론 인간은 역사적 동물이지 자연과는 다르다. 그리고 사고(思考)가 자의(自意)든 타의(他意)든 간에 구속 없는 삶을 향해 상식을 벗어난 독주를 하고 있는 일부의 사람들도 부러진 코스모스 재생되듯 좋은 환경 속에 던져지면 본인이 가지고 있는 능력과 태생 때의 선한 인간 본연의 자세로 돌아갈 수 있지 않을까. 영원한 인생 숙제(宿題)인 것 같다.
임경전
수필가, M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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