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에서 간발의 차이로 패배했다. 오랜 숨고르기 끝에 나선 것이 캘리포니아 주지사 선거전. 그러나 대패였다. 명색이 한 때의 부통령이다. 대통령후보 경력의 전국구 정치인이었다. 그런데 지방선거에서 망신을 당한 것이다.
‘그의 정치생명은 끝났다’-. 워싱턴 뒤안길에 정통한 사람들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진단이었다. 본인의 생각도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모든 것을 털어버리고 해외여행에 나섰다.
프랑스를 방문했을 때다. 뭔가 분위기가 달랐다. 공항에서부터 정중한 프로토콜이 펼쳐진 것이었다. 마치 현직 미국 부통령으로서 방문한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이내 프랑스 대통령으로부터 전갈이 왔다. 만나자는 것이었다.
그 대접에 고맙기도 하고, 또 궁금해 이유를 물었다. 그 답은 이랬다. “수퍼 파워 미국의 대통령은 외교를 몰라서는 안 된다. 해외문제에 귀하와 같이 경험을 쌓은 미국 정치인은 몇 안 된다. 당신의 시대가 분명히 올 것이니 은인자중하라.”
당시 프랑스 대통령은 샤를 드골이다. 한 때 자신도 ‘정치적 광야’를 경험했다. 그런 그가 리처드 닉슨에게 한 충고다. 그 예언은 적중했다. 몇 년이 안 가 닉슨은 재기에 성공, 대통령이 되고 화려한 핑퐁외교를 펼치게 된다.
송(宋) 태조 조광윤은 후주(後周)의 군부 실력자로 부하 장수들의 추대로 황제가 된 인물이다. 그가 모시던 황제는 오대시대로 불리는 난세에 영걸로 이름을 떨친 후주의 세종(世宗)이다.
그 세종에 대한 조광윤의 한 후일담은 이렇게 전해진다. “세종은 부하 장수 중 조금이라도 상모가 비상해 보이면 모두 주살(誅殺)했다. 혹시 천하대권을 차지하는 데 걸림돌이 될까 보아서다. 그 세종을 나는 측근에서 오랫동안 모셔왔다. 그러나 나는 죽음을 모면했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천하의 주인은 하늘이 정한다는 천명(天命)론이다. 그는 이런 말도 했다. “하늘의 뜻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면 그가 천자가 되는 것도 무방하지 않은가.” 황제위에 오른 뒤 그는 세종의 후손들을 철저히 보호하고 극진히 대접했다.
이 송 태조 조광윤을 적지 않은 역사가들은 역대 중국 황제 중 최고의 인물로 꼽는다. 그 배포에다가 관인(寬仁)의 정신 때문이다.
에피소드를 두 개나 장황히 늘어 논 것은 다름 아니다. 멀리서 바라본 한국정치, 무상급식을 둘러싼 8.24 주민투표 정국이라고 할까, 그 과정에서 보여준 한국 정치의 행태가 너무나 실망스러워서다.
가장 실망스러운 건 뭐니 뭐니 해도 한나라당이다. 아예 전략이 없었다. 무소신에, 적전(敵前)분열상황을 연출했다. 민심의 소재를 외면하다 시피 했다. 그리고서 맞이한 게 무상급식 주민투표다. 그러니 결과는 보나마나가 아니었을까. 25.7%의 투표율을 보인 것이 오히려 이상할 정도다.
적전분열상을 연출한 한나라당, 그 자중지란의 한 가운데 있었던 것은 아무래도 박근혜 진영이 아닐까 싶다. 친박 진영의 참모로 불리는 정치인들은 공개적으로 오세훈 시장에게 막말을 해댔다. 적 진영인 민주당 쪽의 비난이 오히려 점잖은 편이라고 할 정도다.
그들의 수장격인 박 전대표도 그렇다. 오세훈 시장 측은 대선경쟁에 뛰어들지 않을 것이라며 지원을 호소했다. 그런데도 외면했다. 그리고 기껏 한 말이 ‘서울시민이 알아서 판단한 일’이라고 한 것이다. 무상급식문제가 마치 딴 나라 일 같은 표현이다.
왜 박근혜 진영은 이처럼 냉담한 태도로 일관했을까. 주민투표에서 승리하면 오세훈 시장은 박 전 대표의 대권가도에 걸림돌이 된다는 판단에서였을지 모른다. 말하자면 대권가도에 방해가 되는 인물은 일찍이 싹을 잘라야 한다는 멘탈리티에 사로잡힌 것 같은 모습이다 다른 한편 패배했을 때에는 그 대미지를 극소화한다는 약삭빠른 계산도 하면서.
그 박 전 대표를 바라보는 보수유권 층의 심정은 어떨까. 아마 배신감을 먼저 느끼는 것이 아닐까. 대권주자란 인물의 국량이 저 정도라니 하는 실망감과 함께. 이런 점에서 8.24 주민투표 패배의 최대 피해자는 한나라당, 그 중에서도 박근혜 진영이 아닐까.
오 시장에게도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다. 당내 각 정파의 동의와 협력을 이끌어 내지 못했다. 영락없는 아마추어 정치인에, 독불장군의 모습이다. 그리고 숏 메모리의 정치판이 한국 정치판이다. 그러니 한번 정치무대에서 사라지면 그 대로 끝날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오세훈도 분명한 패배자다.
그러나 그 패배가 그렇다. ‘장렬한 전사’를 택했다. 이를 통해 ‘소신의 정치인’이라는 이미지를 굳혔다. 그 모습은 ‘대통령 노무현’을 탄생 시킨 과거 ‘바보 노무현’을 방불케 한다. 한나라당이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는 마당에 신세대 보수정치지도자로 확실한 자리매김을 한 것이다.
무엇을 말하나. 머지않은 훗날 보수진영의 확실한 대권주자감으로서 컴백할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오세훈의 패배는 ‘피로스의 패배’로 정의하고 싶다 ‘상처뿐인 승리’와 정반대 대칭선상에 있는, 실(失)보다 득(得)이 많은 패배란 의미에서.
옥 세 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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